가장 완벽한 엔딩을 향해
홋카이도 최북단 왓카나이에서 출발해 남동부 하코다테까지 총 800km에 이르는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담았다. 거리와 속도만 계산했다면 결코 닿을 수 없었을 최종목적지. 여행은 물론 살아가는 데에는 계산된 수치나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페달을 밟으며 깨우쳤다.
↑ (위)밀크로드에서 본 고마가타케산 (아래)홋카이도 자전거 여행 여정표 |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고 난 뒤 평소와 다른 낯선 나 자신을 마주할 때가 종종 있다. 그중 하나는 즉흥적 인간에서 계획형 인간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 동안의 계획을 상세하게 나누고 설정하는 행위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하루에도 수십 번 날씨 앱을 확인하는 것이 습관을 넘어 집착이 됐다. 자연의 섭리가 초단위로 순식간에 결과를 뒤집는 스포츠게임도 아닌데 떨어진 기온이 금세 오르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기대가 집착을 낳고 있다.
최저 기온이 영상 5도 아래로 떨어진 데다 며칠간 꽤 많은 양의 강수량을 나타내는 비 소식까지, 비와 구름 모양의 아이콘이 줄지어 등장하면서 여정에 ‘적신호’가 켜졌다. 유럽에서 자전거 여행 중인 친구에게 어려움을 토로하자, 그는 “자전거 여행에서 비와 추위의 결합은 ‘지옥행’과 같다”는 말로 현 상황을 말끔히 정리해줬다. 지옥행을 면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 비와 추위로부터 피할 장소를 찾는 것. 오누마 호수 근처 호텔에서 며칠간 쉬기로 했다.
↑ 고마가타케산 주변에 자리한 미유키 마을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풍경이다. |
일본은 2019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8%에 달한다.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선진화된 유럽 국가들이 20% 초반대인 데 반해 일본은 고령화가 훨씬 진행된 국가로 ‘초고령화사회’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특히 홋카이도는 일본에서 가장 고령화된 대표적인 지역으로서, 향후 2035년에는 인구 3명 중 1명이 65세 이상에 달한다는 전망이 제기될 정도다. 홋카이도의 슈퍼마켓에선 장바구니나 카트에 매달린 돋보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서울의 슈퍼마켓에서도 목격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 기찻길을 따라 조성된 미유키 마을, 오누마 호수를 한 바퀴 돌며 라이딩을 즐겼다. |
일본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틀 동안 거의 하루 종일 비가 퍼붓다시피 했고 최저기온은 영상 3도를 웃돌았다. 비가 그치면서 강풍이 들이닥쳤고 이로 인해 체감온도는 영하권으로 떨어졌다. 비가 그친 뒤에도 호텔의 숙박일정을 며칠 더 연장했는데, 그 이유는 강풍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페달을 밟고 호수를 한 바퀴 구경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오누마(Ōnuma)와 코누마(Konuma) 두 개의 호수가 마주보듯 자리한 오누마 준국립공원(Ōnuma Quasi-National Park)이 이번 여정에서 즐길 수 있는 홋카이도의 마지막 자연 경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 최종목적지인 하코다테까지는 불과 30여km 떨어져 있다. 홋카이도의 유명 온천마을인 노보리베쓰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맞닥뜨린 유명 관광지를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 (위로부터)호수 안에 126개의 작은 섬이 흩어져 있는 오누마 호수. 섬을 연결하는 18개의 다리가 호수 곳곳에 위치해 있다. 호수 내 여러 섬을 둘러보는 산책길. |
둘레가 14km에 달하는 오누마 호수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호수 안에 126개의 작은 섬이 흩어져 있다는 것. 또한 이들 섬을 연결하는 18개의 다리가 수면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데 마치 물 위를 걷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다리로 연결되어 여러 섬을 둘러보는 산책길이 짧게는 15분에서 길게는 50분 코스로 조성되어 있다.
이 중 ‘석양의 길’이라 명명된 산책 코스는 고누마 호수를 중심으로 펼쳐지며, 고누마 다리 일대가 석양이 아름다운 명소로 일몰을 감상하기 최적의 장소다. 고마가타케산을 배경으로 오누마 호수를 감상하기 위해 호수 한가운데를 유영하듯 이동하는 유람선을 타기도 하고, 자전거 페달을 돌려 호수 한 바퀴를 돌며 자연의 색과 향을 깊이 있게 경험하는 호사를 누렸다.
↑ (좌)고누마 호수 석양의 길에서 맞닥뜨린 일몰 풍경, (우)1914년에 산신을 모신 고마가타케 신사가 오누마 호수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
자전거 여행 초반 편의점에서 구입해서 맛본 우유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평소 유제품을 일부러 챙겨 먹는 편은 아닌데 아무래도 자전거로 인해 체력 소모가 많다 보니 영양 보충을 이유로 한번 먹어봤다가 홋카이도 우유 맛에 홀딱 반해버렸다. 이곳 우유 맛의 특징은 일단 매우 신선하다는 것. 농장에서 막 짜낸 소의 젖을 맛보는 기분과 맞먹는다. 두 번째 특징은 진한 우유의 고소함이 처음부터 끝까지 입안에 맴돈다는 것. 한 번은 커피에 우유를 첨가해 먹었는데 커피의 장점을 살린 고소하고 깔끔한 맛이 너무 좋았다. 이후 한동안은 라떼가 아니고서는 커피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일본 최대 낙농 지역인 홋카이도에서 일본 전체 우유 생산량의 55%가 만들어진다. 우유와 요거트는 기본, 유제품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이나 푸딩, 치즈, 케이크 등의 디저트가 유명하다. 홋카이도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디저트의 힘’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누마 준국립공원에서 남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밀크로드(Milk Road)라 이름 붙여진 도로가 있다.
↑ (위로부터)밀크로드 초입을 알리는 표지판, 밀크로드에 자리한 최첨단 시스템이 갖춰진 축사 전경과 젖소들 |
자전거를 타고 도착한 밀크로드는 초입에서부터 분뇨냄새로 추정되는 젖소 농장 특유의 향이 코끝을 먼저 반겼다. 몇백 미터마다 농장이 하나둘씩 나타났고, 최첨단 시스템이 갖춰진 축사에서 평온해 보이는 젖소의 얼굴이 양질의 맛을 연상케 했다. 손으로 젖을 짜고, 최고 품질의 천연사료를 소의 먹이로 사용하며, 고마가타케산의 맑은 물과 정기를 통해 농장을 가꾸는 것이 밀크로드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몇몇 농장에서는 유제품을 판매하는 디저트 카페가 농장 한 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자체 농장에서 생산한 신선하고 고품질의 유기농 우유를 사용한 소프트아이스크림이 대표적인 메뉴다. 훗카이도 여행 초반 진한 맛의 우유를 맛보았다면, 아이스크림의 신선함을 입안 가득 간직한 채 달린 밀크로드에서의 라이딩은 더없이 완벽한 엔딩의 시작과도 같았다.
↑ 쿠보타 유제품 농장 한편에 자리한 카페. 말차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인기메뉴다. |
유명 관광지에서의 시간은 눈깜짝할 사이 지나간다. 각 장소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탓에 이곳 저곳 방문하며 여행하기도 참 쉽다. 방문객이 넘쳐나니 그만큼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까닭이다. 4박5일이 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숙박일수를 더 연장하고 싶어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떠나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편리를 쫓으면 안주하게 된다. 자전거 여행은 매 순간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건네준다. 그리곤 이를 통해 안주하지 않는 힘을 기르도록 만든다. 그렇게 며칠간 머무른 안락한 침대를 벗어나 다시 도로 위에 섰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여정 23일 차, 차갑지만 춥지는 않은 아침의 공기를 들이키며 마침내 최종목적지인 하코다테를 향해 페달을 밟는다.
↑ 오르막 도로의 끝에서 바라다본 고누마 호수 전경 |
5번 국도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내리막 도로가 시작되더니 96번 국도로 우회전할 때까지 장장 4km 구간이 전부 내리막길이다.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가 슝슝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간다. 양쪽 브레이크를 너무 강하게 잡은 탓인지 두 손에 쥐가 날 것만 같다. 거북이걸음 마냥 오르막을 올랐던 속도에 보상을 받기라도 하듯 쏜살같이 빛의 속도로 내리막을 지나친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속도도,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속도도 전부 나의 기록이다. 느리다고 불평만 늘어놓을 수도, 빠르다고 온전히 즐길 수만은 없는 것이 라이딩의 가르침이다. 그러니 속도는 중요치 않다. 그저 모든 길은 다 필요하고 소중하다.
↑ 홋카이도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터널 |
↑ (좌)최종목적지인하코다테에 도착한 첫날밤의 풍경 (우)왓카나이에서 하코다테까지, 23일간 약 800km의 라이딩을 완수했다. |
하코다테에 도착한 날 저녁, 호텔 주방에서 식사를 하던 중 TV 뉴스에서 전하는 날씨예보에 함께 있던 일본인들이 느닷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다름 아닌 이날 왓카나이(홋카이도 최북단 지역)에 2024년 첫 눈이 내렸다는 소식이었다. 이는 올해 홋카이도의 첫 눈이었다. 그제서야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왔다. 3주 전, 왓카나이에 도착해 여정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겼는데, 첫 눈이라니.
가을에서 겨울로, 단풍나무에서 눈이 덮인 나무로,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