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톡홀름대 도서관에 비치된 한강 서적, MBN 촬영 [사진=MBN] |
한강 작가가 한국 시각으로 11일 새벽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스웨덴에서의 현지 취재로 분명해진 것은 한강의 작품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가 각각 2016년과 2017년에 스웨덴어로 처음 번역됐을 때부터 스웨덴 출판계의 반응이 뜨거웠고, 스웨덴 학계도 '한국학' 강의에 이 작품을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모두 번역과 동시에 이뤄진 일들입니다. 그렇기에 번역의 힘이란 실로 놀랍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벨문학상 선정 기관인 스웨덴 한림원 역시 여러 나라의 언어로 된 작품들을 읽어 본다지만, 스웨덴어로 번역된 작품들의 수가 많을수록 한림원의 접근성이 높아지기에 해당 작가의 수상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취재를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번역가들의 이력입니다. 예를 들어, 한강의 '흰'과 '작별하지 않는다' 등을 스웨덴어로 번역한 영국 런던대 동아프리카대(SOAS)의 안데르스 칼손 한국학과 교수는 1960년대에 스톡홀름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공부했습니다.
↑ 런던대 SOAS 한국학 소장 칼손 교수 부부 [사진=연합] |
1960년대에 스웨덴의 대학교에 한국전쟁의 풍파를 겪은 한국을 공부하는 '한국학' 과정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스웨덴에 지금은 한국 문학 번역 과정이 잘 마련되어 있는 걸까요? 어떤 한국 문학 작품들을 스웨덴 등 해외 독자들이 주로 찾아 읽을까요?
이 모든 궁금증을 스웨덴 현지 취재에서 풀어 보았습니다. 노벨문학상에 친숙하지 않은 이들이라면 궁금해 할 노벨문학상 시상과 관련된 비화도 함께 풀어 봅니다.
↑ MBN과 인터뷰한 소냐 호이슬러 스톡홀름대 교수 [사진=MBN] |
먼저 한국어 번역가들을 탄생시킨 스톡홀름대학교의 한국학 과정이 1960년대에 일찌감치 생긴 배경을 알아봤습니다. MBN이 만난 스톡홀름대학교의 소냐 호이슬러 한국학 교수는 스웨덴 스톡홀름대의 한국학 과정이 조승복 교수 덕에 창설됐다고 짚었습니다. 조 교수는 일제시기 만주에서 태어나 스웨덴으로 건너가 일본어를 가르친 사람입니다. 한국학 과정이 추가로 생긴 것은 그가 한국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유럽 대학들의 한국학 교육은 주로 대학에 소속된 한국인 교원이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시작됐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조승복은 이런 한국인 교원들 중에도 '숨은 거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22년 만주국 치하에서 태어나 관비장학생으로 동경에 유학해 당시 일본 최고의 수재들이 입학한 동경제일고에 입학한 조승복은 이후 입학한 동경대에서 일제 치하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 조승복 교수의 사진 [사진=스톡홀름대 홈페이지, Korean Language and Culture at Stockholm University] |
이후 기독교 조직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 조승복은 한국전쟁을 겪자 미국의 개입을 반대하고 남한과 북한 양쪽에 비판적인 반전 운동을 펼치다가 추방을 당해 노르웨이를 거쳐 스웨덴으로 갑니다. 스웨덴에서 웁살라대의 철학 대신 언어학 자리를 권고받아 강의를 하다가 스톡홀름대에서 일본어 과정 교수직을 얻게 되죠. 남한 정부의 초청(1969년)과 북한의 초청(1970년)에도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 조승복은 이후 자유 민주주의 사회를 꿈꾸며 김대중, 김지하 구명 운동을 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 스톡홀름대 도서관 풍경, MBN 촬영 [사진=MBN] |
조승복과 같은 한국인 교원 등을 뒀기에 한국학 과정을 창설한 유럽 대학들은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언어학에 관심을 두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정치학, 문화학 등 사회과학 분야로 관심사를 옮겨가고 있습니다.
스톡홀름대 한국학 과정의 소냐 교수도 이런 맥락에서 한강의 작품들을 스웨덴에서 출판되자마자 강의에 활용했습니다. 소냐 교수는 "'한국어 1' 수업은 한국의 현대 문학, 고전 문학뿐 아니라 역사, 정치사 등을 가르치는 인문학 강의"라며 학생들이 추천 도서인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광주 5.18 민주화운동과 제주 4.3 사건 등에 관심을 갖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강의 작품이 스웨덴에서 출판되기 전에는 스웨덴어로 먼저 번역이 되었던 황석열, 이문열 등 소수의 작품들이 추천 도서 리스트에 먼저 들어가 있었다는 전언입니다.
한국학 과정은 한국 문학 번역가들의 요람입니다. 현재 다수의 한국 문학 번역 강연이 열리고 있습니다. 소냐 교수는 한국 문학을 스웨덴에서 제대로 번역해 보기 시작한 것은 15년 전부터이며 이전에는 번역된 작품 수가 많지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 MBN과 인터뷰한 소냐 호이슬러 스톡홀름대 교수 [사진=MBN] |
소냐 교수가 짚었다시피 우리 작품의 해외 번역이 체계적으로 지원된 것은 2000년대부터입니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생겼고, 출판계와 정부가 해외도서전 참가로 작가의 해외 진출을 도왔습니다. 해외 출간 지원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대산문화재단의 공도 컸습니다. 대산문화재단은 한강 작가의 부커상 수상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영미권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해외 번역과 출간이 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번역 작업이 유럽 각국에서 활발하게 이뤄졌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한국 작가들의 작품일지라도 영어에 기초한 번역이 아닌 원판, 즉 한국어에 기초해 번역된 책은 아직 많지 않은 실정입니다. 부족한 원판 번역은 한국 문학의 발전에 있어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요.
↑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한강 작가의 책들, 스톡홀름 내 시립도서관 전산망 촬영, MBN 촬영 [사진=MBN] |
이 원판 번역도 최근에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예를 들어, 한강의 작품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는 데보라 스미스 번역가의 영어 번역에 기초해 스웨덴어 번역이 이뤄졌지만, 한강의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는 앞서 언급한 런던대 안데르스 칼손 한국학과 교수와 그의 아내인 박옥경 번역가의 협업으로 원판 번역된 바 있습니다.
현재는 한국 문학 작품 약 25편이 스웨덴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인지도는 어떨까요? 스톡홀름의 쿵스홀멘 시립도서관 신미성 사서는 "한강 작가는 작품 4권이 스웨덴어로 번역됐고, 미디어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작가이기 때문에 스웨덴 시민들이 이미 많이 즐겨 봤던 작가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과거 낭독회 때 시민들의 참여율도 높았고 스웨덴 대중의 입장에서도 갑자기 알려진 작가는 아니란 설명입니다.
↑ MBN과 인터뷰한 쿵스홀멘 시립도서관 신미성 사서 [사진=MBN] |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스웨덴 스톡홀름 시민들의 다른 한국 작가들에 대한 책 대출 수요가 대폭 커졌다는 점입니다.
스톡홀름 시내 약 40개의 시립도서관의 상호 대차가 이뤄지는 전산을 살펴보는 신미성 사서는 MBN에 영어로 번역된 책 '82년생 김지영'과 '파친코'의 대출이 늘어났고, 스웨덴어로 번역돼 있는 소설가 김영하의 작품과 올해 스웨덴어로 번역된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대출하는 시민들의 숫자도 늘어났다고 밝혔습니다.
한강 작가 이전에도 한국 문학의 세게적인 저력은 지난 2011년 신경숙 작가의 책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부터 주목받은 바 있습니다. 소냐 교수도 "이때 K-문학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북미에서만 집중적으로 한국 문학이 알려진 실정이었습니다. 지금은 세계인이 읽는 한국 문학 작품이 다양해졌습니다. 사랑받는 한국 문학의 장르도 확장됐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동 문학 장르가 그렇습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유명한 동화 작가인 황선미 작가의 경우 북유럽도 사랑하는 아동 문학 작가입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들은 스톡홀름 대형 서점의 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1위(채식주의자)와 3위(소년이 온다), 6위(작별하지 않는다)와 7위(흰)를 나란히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인기 상위권인 작품들은 왜 그런지 짚어 보겠습니다.
↑ 스톡홀름 서점 내 베스트셀러 진열대. 1위(채식주의자)와 3위(소년이 온다), 6위(작별하지 않는다)와 7위(흰) 모두 한강 작가의 작품들 [사진=MBN] |
1위인 '채식주의자'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의 수상으로 일찍이 명성을 떨친 바 있습니다. 지난해 스웨덴 왕립드라마 극장에서 올린 '채식주의자' 연극으로 대중성도 확보했습니다. 2위인 '소년이 온다'도 스웨덴에서 2016년에 먼저 번역돼 출간된 지 오래된 작품이란 특징이 있습니다.
독자들이 느끼는 감정은 조금씩 다른데요. 해외 학생들의 독후감을 읽어본 소냐 교수는 최근 '소년이 온다'가 인기를 무섭게 얻어가는 작품이라 말했습니다. 학생들이 "'소년이 온다'는 배경을 이해하면 좀 더 이해가 쉽고, 매우 어두운 소설이고 며칠 생각하면서 읽어야 하지만 공감할 대목도 많다"며 최근 많이 찾아본다는 것입니다.
이어 '채식주의자'는 스웨덴에서 최근 힘을 얻는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꽤 찾아 읽었으며, '작별하지 않는다'는 장소의 특수성이 없어 보다 잘 와닿았다는 평이 많았고, '흰'은 심도 있는 글이라 이해가 어렵다고 학생들이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강 작가가 한국 독자들에게 추천한 독서 순서는 어떨까요? 한강 작가는 현지 시간 11일 스톡홀름에서 가진 한국 언론 대상 기자간담회에서 '채식주의자'를 가장 마지막에 읽을 것을 추천했습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품 세계가 연결돼있으니 '소년이 온다'를 먼저 읽은 뒤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또 독자마다 취향이 다르니 진한 책보다 성근 책을 원한다면 '흰'과 '희랍어시간'을 읽는 게 좋고, 이후에 '채식주의자'를 읽으면 더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설명입니다.
일각에서는 노벨문학상을 탄 한강 작가가 어두움만을 묘사한 작가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한강 작가는 늘 희망을 함께 묘사했습니다. 스웨덴 한림원 엘렌 맛손 종신위원도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사람들은 상처받고 취약하지만 그래도 충분한 힘을 가졌다"며 "힘을 가졌기 때문에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질문을 던지고, 자료를 더 요청하고, 살아남은 목격자를 한 명 더 만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강 작가는 한국 언론 기자간담회에서도 폭력적인 역사가 반복돼 무력감을 느낄 때는 어떻게 힘을 낼 수 있느냐는 질문에도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려면 최소한의 믿음이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이 돼요. 믿음이 없다면 이 언어가 연결될 것이란 믿음이 없다면 한 줄도 쓰지 못할 거 같아요.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믿음을 근거로 한 거죠. (중략) 결국은 우리가 이렇게 말을 건네고 글을 쓰고, 우리가 읽고 귀 기울여서 듣고 이런 과정 자체가 결국은 우리가 가진 희망을 증거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는 한강의 인생관이 녹아든 듯 한데요. 한강 작가는 노르웨이 미래도서관의 2018년 당선자로 선정됐을 때도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저는 불충분한 낙관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쓰는 것,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라고 믿고 있어요."
여기부터는 노벨문학상에 대한 호기심을 푸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과학자인 노벨은 왜 문학상을 제정했을까요? 노벨은 어릴 적부터 노년까지 시와 극작 등을 쓰며 사색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노벨상박물관에도 노벨이 쓴 글이 전시돼 있었는데요.
↑ 노벨이 쓴 극작 '네메시스', 노벨이 쓴 글 중 하나 [사진=노벨상박물관] |
노벨은 외로움을 느끼거나 사업에 지치고 음모에 시달릴 때 주로 생각을 돌리기 위해 펜에 의지했다고 합니다. 시는 그에게 에너지와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런 노벨은 뛰어난 작가들을 늘 흠모해왔습니다. 노벨의 유언장에도 그의 평생 시에 대한 사랑에 대한 마지막 증언으로, 상 중 하나는 "문학 분야에서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창작한 사람"에게 수여하란 글을 남기게 됐습니다.
노벨상 시상 과정을 보며 많은 분들이 궁금증을 느낀 부분도 있었습니다. 다른 노벨상은 영어로 시상하면서 왜 문학상만 스웨덴어로 시상하느냐는 것입니다. 노벨상위원회에 기자가 이유를 물어보니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전통'이란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스웨덴어로 시상할 때 마지막 줄은 수상자의 모국어 또는 영어로 읊는데 올해는 영어가 울려퍼졌다는 점입니다. 시상자인 엘렌 맛손이
노벨문학상은 하나의 작품으로 상을 타지 않습니다. '작품 세계'로 상을 탑니다. 즉 작가, 그 자체가 인정을 받아 받는 상인 것입니다. 한강 작가의 다음 저서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 김문영 기자 kim.moonyoung@mb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