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 넘쳐나는 외포항
굴 양식으로 유명한 내간리 앞바다
목덜미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저절로 목이 움츠러든다. 겨울이 왔다는 말인데, 이 말은 곧 바다에 맛있는 음식이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이 가장 맛있는 바다 맛의 대표 주자인 굴부터 대구를 먹으러 거제로 가자.
↑ (위)거제의 명소 바람의 언덕 (아래)굴양식장으로 빼곡한 내간리 앞바다 |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누가 이렇게 물어볼 때마다 주저 없이 “굴입니다!”라고 힘차게 대답한다. 굴은 레몬즙을 살짝 뿌려 생으로 먹어도 맛있고, 껍질째 구워 먹어도 맛있고, 오일 파스타를 만들어 먹어도 맛있다. 계란탕에 서너 알 넣어도 맛있고, 라면에 몇 개 넣으면 그야말로 끝내주는 맛이 된다. 굴전과 굴튀김은 두말할 것도 없다. 존경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굴을 좋아한다. 아니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 그는 굴에 관한 지극한 에세이까지 썼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이 문장은 얼핏 보면 아주 무미건조하고 덤덤한 표현 같지만, 굴 마니아인 나는 하루키 선생이 굴을 먹으며 얼마나 행복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하루키 선생처럼 나 역시 스테이크나 참치회를 먹으며 ‘와! 정말 대단한 맛이다’ 하고 느낀 적은 많았지만,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런데 굴은 ‘행복감’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다. 굴은 그만큼 맛있다.
↑ (좌측 위로부터)겉바속촉의 굴튀김, 향긋한 미나리와 어우러진 굴무침, 푸짐한 굴구이 한 판, 검은 테두리가 선명한 굴이 싱싱하다. (우측 사진)겨울 외포항은 곳곳에 대구가 널려 있다. |
굴을 이렇게 푸짐하게 쌓아놓고 먹다니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맛있게 굴을 먹은 곳은 경남 거제 내간리다. 통영에서 신거제대교를 넘으면 호곡과 녹산, 법동 등지를 지나 거제면 내간리까지 1018번 지방도로가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해안가에 굴 양식을 위한 지주들이 끝없이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굴을 키우는 방식을 ‘수하식’(바다 한가운데 양식장을 만들고 밀물과 썰물에 상관없이 항상 물속에서 굴을 키우는 방식)이라고 부른다.
↑ 알이 꽉 찬 거제 내간리 굴 |
서해안 갯벌에서 캐는 굴이 알이 작은 것도 이 때문이다. 개펄에서 자라는 굴은 물이 들고 날 때 햇빛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성장이 느려 알이 작을 수밖에 없다. 알이 작다고 해서 맛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속이 단단하고 알 옆에 달린 날개 부분의 털은 크고 긴데, 이 때문에 양념이 잘 스며든다고 한다. 한편 알이 큰 남해안 굴은 구워 먹기에 딱이다. 거제 내간리 해안가를 따라가다 보면 굴구이를 내는 집이 모여있는데 어느 집이나 맛이 다 비슷비슷하다.
굴구이를 주문하면 맛보기로 생굴이 나온다. 곧이어 굴튀김과 굴무침이 가득 담긴 접시가 놓인다. 외국인이 본다면 기절할 풍경이다. 호주를 캠핑카로 여행할 때 굴이 유명한 곳이라고 해서 마트에 갔는데 1더즌(dozen, 12개)이 무려 5만 원이 넘었다. 그래서 그날도 어쩔 수 없이 가장 싼 소고기를 먹어야 했다. 유럽도 가격이 비슷했다. 두바이는 오이스터 바가 1인 100만 원이 넘었다. 일본 히로시마도 굴이 유명한 곳인데 굴 가격이 우리보다 서너 배는 비쌌다.
↑ 대구는 입이 크다고 해서 대구다. 우측 사진은 갓 잡은 대구를 널고 있는 어부. |
↑ 굴구이를 먹기 위한 준비 |
뽀얀 국물의 대구탕은 최고의 해장 음식
거제는 참 먼 곳이다. 먼 걸음 갔는데 굴만 먹고 오기엔 아쉽다. 대구도 꼭 먹어보자. 거제는 국내 최고의 대구 산지다. 한때 대구가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금대구’라고 불릴 정도로 비쌌다. 어쩌다 한두 마리가 잡히면 수십만 원에 팔렸다는 기사가 신문에 소개될 정도였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거제수협이 대구알 방류 사업에 성공하면서 2000년대 중반부터 외포항으로 대구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금 거제 외포항은 전국 대구 물량 3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 대구를 실어나르다 잠시 쉬고 있는 사람들 |
대구탕 하면 많은 이들이 ‘원대구탕’이 있는 삼각지 대구탕 골목과 광장시장의 ‘은성회집’을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마포 서교동에 자리한 춘자대구탕은 서울에서는 드물게 생대구탕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사장님이 주말마다 대구 낚시를 하러 다니는 마니아이기도 하고 삼척, 속초, 울진 등지에서 매일매일 생대구를 공수받는다고. 그러니까 월요일에 이 집을 찾으면 운이 좋다면 사장님이 낚시로 직접 잡아온 생대구를 맛볼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몇 해 전 이 집에서 생대구탕을 맛보고 난 후 내게 최고의 해장국은 복국도 콩나물국도 아닌 대구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국내 최대의 대구 산지에서 맛보는 대구탕은 또 얼마나 맛이 있을까.
↑ (위로부터)대구알젓, 미역에 싸서 먹는 대구회무침, 대구를 회무침으로도 먹는다. 대구살과 고니, 알이 푸짐하게 든 대구내장찜 |
대구내장찜도 칼칼하니 맛있다. 살코기가 부서질세라 젓가락으로 살살 집어 입속으로 가져가니 스르르 눈 녹듯 녹아내린다. 다들 희희낙락하며 탕과 찜을 번갈아 가며 먹었다. 무슨 음식이든 현지에서 먹고 여행의 감성이 첨가되면 몇 배는 맛있어진다.
외포항 곳곳에서는 대구를 말려 건대구로 만드는 작업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부둣가 햇볕이 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내장을 빼고 나무꼬치로 꿴 대구가 널려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말린 대구를 콩나물, 채소 등과 함께 쪄 먹는 대구찜도 맛있다고 한다. 생대구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쫀득한 맛과 말린 생선 특유의 감칠맛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산의 아귀찜도 원래는 바닷바람에 말린 건아귀를 사용했다. 다음에는 말린 대구찜을 꼭 먹어봐야겠다.
↑ (위로부터)전국 대구 물량 30% 이상을 차지한다는 외포항의 아침 풍경, 신선이 놀다 간 풍경이라는 뜻의 신선대, 뽀얀 국물의 대구탕 |
거제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꼽으라면 아마도 신선대와 ‘바람의 언덕’이 아닐까. 해금강 가는 갈곶리 도로 오른편에 신선대가, 왼편에 바람의 언덕이 나란히 자리한다. 신선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신선이 내려와 논 곳이다. 그만큼 해안 풍경이 아름답다. 바람의 언덕은 갈곶리 도장포마을 북쪽 해안에 있는 언덕으로 사시사철 바닷바람이 분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 붙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선을 따라 운전해 가다 보면 학동흑진주몽돌해변에 닿는다. 검은색 몽돌이 가득한 몽돌밭 해변이다. 돌은 누군가 왁스 칠을 해놓은 듯 반들반들하게 윤이 난다. 몽돌밭에서는 눈보다 귀가 즐겁다. 바닷물이 밀려들고 나갈 때마다 몽돌이 구르며 동글동글한(이렇게밖에 표현을 못 하겠다) 소리를 만들어 낸다. 이 소리는 ‘우리나라 자연 소리 100선’에 선정될 만큼 아름답고 감미롭다.
↑ 동글동글한 자갈이 깔려 있는 몽돌해변 |
우리가 언제나 행복하다면 ‘행복’이라는 말이 없을 것이다. 불행도 마찬가지. 행복과 불행은 밀물과 썰물처럼, 밤과 새벽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그러니 우리는 긴 안목을 가지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면 된다. 햇빛 가득한 날씨를 즐기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보낼 것. 인생은 그게 다다.
↑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
↑ 거가대교의 모습 |
↑ 대구를 회무침으로 먹어본다. |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58호(24.12.1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