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릉 <쇼는 없다> |
모두 어릴 적 꿈꿔온 모습대로 살고 계신가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던 패기는 사라지고 하루하루를 버티듯 견디는 삶을 덤덤히 받아들이다가도 씁쓸함이 가시지 않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릴적 꿈꾸던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지루하고 허름한 내 일상 속으로 찾아온다면? 심지어 그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레전드'라면?
빛나는 무대로 끝내 등판하지 못한 채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모두를 생각만 해도 가슴뛰는 상상으로 초대하는 소설, 이릉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자 제1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쇼는 없다』입니다.
모든 일은 10월의 마지막 밤 핼러윈을 맞은 서울 이태원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시작됩니다. 20년 째 게하를 지키고 있는 건 임시 아르바이트생 47살의 주인공. 경제적 여유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별볼일 없는 어른이 됐지만, 그에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미국에 살던 삼촌이 보내준 프로레슬링 잡지 표지에서 프로레슬러 '워리어'를 보고 자연스레 그의 팬이 됐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프로레슬링 놀이를 하다 선배의 레슬링 기술에 머리를 다치고, 그 후 주인공의 인생은 링위에 올라가지 못한 채 바깥을 배회하는 레슬러 같은 처지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추억속의 그 '워리어'가 인디언 전사의 마스크페인팅을 하고 수영복 팬티 차림으로 게스트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워리어'를 비롯해 1990년대 초반 월드레슬링엔터테인먼트(WWE)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레슬링 스타들이 총출동해 최후의 대회를 치르는데, 40대 중반인 주인공 역시 얼떨결에 대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중학교 시절 씻을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겨준 숙적을 상대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티셔츠를 찢으며 포효하던 헐크 호건, 경찰복을 입고 곤봉을 휘두르던 보스맨, 목에 뱀을 두르고 링위에 오르던 스네이크맨,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긴 구렛나루가 인상적인 홍키통크맨, 마초맨, 달러맨…
작품은 1980~1990년대 AFKN에서 접했던 프로레슬링 영웅들로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들을 통해 주인공은 팍팍한 일상 속에서 과거의 트라우마와 마주하고 새로운 희망을 봅니다. 이 통쾌하고, 따뜻하고, 질서정연한 난장판 속에는 자신이 극적인 부활의 시나리오 안에 있다고 믿는 시대착오적 인물들의 허세 가득한 대사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우스꽝스럽고도 슬픕니다.
엉뚱한 행동과 기지 넘치는 대사들로 짚어낸 현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은 세대를 넘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프로레슬링 세대가 아닌 독자들이라도 인물들이 겪는 내면의 갈등과 치유 과정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책장을 덮을 때쯤엔 이미 삶의 쓴맛을 경험한 중년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꿈과 열정을 간직한 모든 세대의 가슴 속에 뜨거운 감동과 위로가 밀려올 것입니다.
↑ 이릉 작가 |
15년간(2004~2019년) 스포츠신문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작가 이릉은 이번 작품을 통해 전업 소설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쇼는 없다> 그의 첫 출간작으로, 5천만 원의 고료가 주어지는 제12회 수림문학상 수상작입니다.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