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온천의 뜨끈한 위로
동아서점·완벽한날들·문우당서림 등 서점 맛집
속초엔 바다와 회 타운만 있는 게 아니다. 척산온천이라는 좋은 온천이 있다. 온천하고 막국수 먹고 커피 마시며 느긋하게 이틀을 보내다가 왔다. 옛 조선소를 리모델링해 카페와 서점으로 꾸며놓은 곳에도 갔는데, 속초에서 한 달만 살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속초의 아침. 등대 너머로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
두 번째 속초에 간 건 대학입시를 마치고 친구 다섯 명과 함께 떠난 3박 4일 여행이다. 설악동 앞 광장에 서 있는 커다란 이글루 속에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었고, 자그마한 택시에 여섯 명이 구겨져서 타고 숙소로 돌아온 것만 또렷하게 기억날 뿐이다. 사흘 동안 여기저기 명소를 돌아봤을 텐데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다는 게 이상했다. 아니 어쩌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열여덟 살의 남자 아이들은 ‘무언가를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 나이에는 끼리끼리 어울려 함께 돌아다니면 무작정 좋다.
↑ 속초 해변의 아침, 속초 해안도로 아침 풍경 |
↑ 지금의 척산온천은 1985년 새로 지었다. 맨발산책로에서 바라본 척산온천 |
척산온천은 설악산이나 속초 바닷가로 갈 때 몇 번 지나쳤다. 다소 오래된 듯한 건물을 보며 ‘역사가 제법 깊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온천 로비에 옛날 온천 건물 사진이 붙어 있는데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오래된 듯하다. 팔작 기와지붕을 올리고 페인트로 ‘척산온천’이라고 쓴 간판을 달고 있는데, ‘1973 척산온천 휴양촌 옛 모습’이라는 설명이 짤막하게 붙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85년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작은 온천 건물 하나로 시작해 지금은 호텔과 대욕장, 찜질방 등의 시설을 갖춘 큰 온천장이 된 것이다.
↑ 가벼운 마음으로 척산온천수로 족욕을 즐길 수 있다. |
음, 그렇다면 온천이 있다는 걸 직감한 일본이 아니었다면, 온천을 메우고 도망간 일본인 대신 온천을 개발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척산온천은 없었다는 말일 것 같은데… 만약 이 자리에 온천이 없었다면 아직 이곳의 초목은 겨울에도 푸를까, 하는 다소 쓸데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카운터에서 입장권을 끊는다. 입장 방법과 찜질방으로 가는 법을 설명해 주는 직원이 너무나 친절하고 능숙하다. 카운터 직원은 표만 끊어주는 게 아니었다. 손님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카운터인데, 여기서 직원의 친절과 프로페셔널함을 경험하면 업장에 대한 신뢰도가 확 높아진다. 온천 유니폼을 입고 있는 직원의 모습에서 척산온천의 자부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척산온천 숲길 |
척산온천은 온천수를 지하 400미터에서 끌어올린다고 한다. 용출 온도는 53.7℃. 온도가 부족한 곳에서는 물을 끓여 사용하기도 하지만 척산온천은 그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식혀야 한다. 그래서 물을 끓이는 과정에서 행여 기화될 수도 있는 성분들을 최소화할 수 있다. 척산온천의 물이 좋다고 하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척산온천수는 불소와 라듐이 포함된 강알칼리성 온천이라 피부 세정 작용과 노폐물 제거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온천을 하고 나와 뭔가 잠깐 동안 피부가 매끈거린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있지만 ‘오호! 효과가 정말 기막히군’ 하면서 감탄했던 적은 없었다. 그냥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그 시간이 좋은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인생에 대한 낙관이 뜨거운 김처럼 몽글몽글 피어 오르는데, 그게 아마도 온천의 진정한 효능이 아닐까 싶다.
↑ 찜질방과 연결되어 있는 척산온천 휴양정과 내부 |
사우나에서 연결된 통로를 따라 가면 찜질방이다. 게르마늄방과 쑥찜질방, 옥찜질방, 수면캡슐방, 침대안마실 등을 갖추고 있다. 편백나무로 만들어진 수면실과 침대 안마방도 있다. 들어서면 상쾌한 편백 향이 머릿속에 가득 찬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찜질방 밖에 있는 황토 불한증막이다. 새벽 5시부터 소나무 장작을 쌓아 불을 지핀다고 한다. 찜질방에는 오래 있지 못하는 체질이라 한증막 위층에 자리한 휴양정으로 갔다. 일종의 전망대 격인데, 여러 개의 큰 창으로 속초의 상징인 울산바위가 보인다. 찜질복을 입고 바라보는 울산바위라니, 이런 호사가 없다.
찜질방에서 뒹굴다가 대욕장으로 다시 와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탕에서 솟아나는 김 위로 설악산 능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마 위로 가느다란 가랑비가 스친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어 본다. 척산온천휴양촌 옆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다. 보기 좋으라고 대충 만들어놓은 숲이 아니다. 무려 3,600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 숲에는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온천 후 기분 좋은 산책을 즐길 수 있다. 2.5km의 맨발 산책로가 따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자연석과 꽃들로 꾸민 석림원과 만난다.
↑ 온천 후에 먹는 막국수 한그릇과 수육은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다. |
온천을 하고 나니 배가 출출하다. 속초에 왔으니 무조건 막국수다. 척산온천휴양촌에서 차로 5분 거리에 ‘범바위막국수’가 있다. 면을 직접 뽑는 집이다. 여기까지 고민은 짧았는데 자리에 앉으면 갈등이 시작된다. 물? 아니 비빔? 갈등하다가도 언제나 나의 최종 선택은 비빔이다. 비빔막국수와 수육 작은 것 하나, 여기까지 왔으니 수육을 맛보지 않으면 서운하다.
반찬으로 무채와 백김치가 먼저 나온다. 비빔용 육수도 따로 내 주신다. 막국수가 나왔다. 삶은 계란 반쪽과 오이, 무, 김가루, 깨가 들어가 있다. 면을 비비는데 진한 메밀 향이 코끝으로 훅 끼쳐온다. 벽에 붙은 ‘맛있게 먹는 법’에는 식초와 설탕을 조금 넣으라고 해놓았지만 내 경우 메밀 그대로의 맛이 좋다. 역시 사우나 후에 먹는 막국수에 비견할 만한 음식은 없는 것 같다. 수육도 잘 삶았다. 속초라 그런지 명태 회무침도 함께 나온다. 수육 위에 명태 회무침 한 젓가락을 얹어 먹으니 궁합이 좋다. 아참, 비빔막국수는 반쯤 먹다가 육수를 부어 먹는 것이 더 맛있게 먹는 요령이다.
↑ 넓은 마당이 있는 도평커피와 도평커피의 시그니처인 ‘팥크림커피’(사진 좌측 아래) |
물 좋은 온천에서 따뜻한 온천욕을 즐기고 막국숫집에서 메밀 향 진한 막국수를 먹었다. 지금은 가을 들판을 바라보며 달콤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인생에서 이런 순간을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언제나 여행을 떠나오면 드는 생각이다. 그러니 여행은 언제나 옳다. 지금 내가 인생의 가장 좋은 순간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니까 말이다.
↑ 1956년 문을 연 동아서점 |
일단 속초에는 좋은 서점이 많다. ‘동아서점’과 ‘문우당 서림’ 그리고 ‘완벽한 날들’이다. 1956년 ‘동아문구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책과 문구를 같이 팔던 동아서점은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리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 주인장 김영건 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키던 동아서점은 2000년대 이후 문을 닫을 정도로 어려워졌지만 아들과 며느리가 다시 맡아 지금은 전국에서 가장 붐비는 서점 가운데 한 곳이 됐다. 동아서점에 진열된 책은 서적 권수만 해도 5만 권. 대표가 신문 리뷰와 SNS 등을 참고해 직접 주문한 것이다.
↑ 주인이 직접 선택한 좋은 책만 파는 동아서점 |
↑ 1984년에 시작된 문우당서림 |
↑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서점, 완벽한날들 |
↑ ‘칠성조선소’(좌)와 맞은편에 자리한 그림책 서점 ‘동그란책’(우) |
↑ 칠성조선소 카페 |
↑ 척산온천족욕공원 |
↑ 갖가지 생선이 올라간 생선구이(좌)와 홍게살 샌드위치(우) |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56호(24.11.2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