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고흐의 삶을 다룬 책을 읽은 가수 돈 맥클린은 노래 ‘Vincent’를 발표했다. 노래의 시작은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으로 시작한다.
‘Starry, starry night … Now I understand / What you tried to say to me /
And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 And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 Perhaps they’ll listen now’
‘별이, 별이 빛나는 밤에…이제서야 저는 이해하죠 / 당신이 내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
제정신을 유지하려 얼마나 아팠을지 / 그들을 놓아주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지 /
그들은 듣지 않을 거예요, 알려 하지도 않겠죠 / 아마 지금쯤 듣겠네요’
↑ 씨 뿌리는 사람 |
이번에 국내에서 12년 만에 열리는 반 고흐 전시는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과 더불어 반 고흐 작품의 양대 보고로 알려진 네덜란드 오털루의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원화 작품을 모았다. 해서 이번 전시의 작품 보험평가액은 무려 1조 원대에 달한다. 그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린 프랑스의 대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모사한 ‘착한 사마리아인’은 반 고흐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사투를 벌이며 그린 고흐의 예술혼 그 자체다. 또한 ‘자화상’, ‘슬픔에 잠긴 노인’, ‘석고상이 있는 정물’, ‘감자 먹는 사람들’, ‘조셉 마쉴 지누의 초상’, ‘씨 뿌리는 사람’ 등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품 중 76점을 엄선했다.
↑ 감자 먹는 사람들 |
• ‘파리 시기(1886~1888)’ 1886년 파리로 이주한 반 고흐는 2년간 동생 테오와 살며 화풍을 정립한다. 그는 인상파와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으며 화풍을 변화시켰고, 로트렉, 앙크탱, 베르나르, 러셀 등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기법을 실험했다. 반 고흐가 남긴 40여 점의 자화상 중에 35점이 파리에서 제작되었다. ‘자화상’은 강렬한 인상을 담아내며, ‘석고상이 있는 정물’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간결한 선과 색채 배색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 고흐는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을 이어갔고, 건강까지 나빠지기 시작했다.
• ‘아를 시기(1889~1889)’ 1888년 2월, 반 고흐는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를 보냈다. 그는 뜨거운 태양 아래 강렬한 색채를 통해 인물화와 풍경화를 제작하며 화풍의 정점을 찍었다. 특히, ‘씨 뿌리는 사람’을 통해 색채 표현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9주 동안 좁은 집에서 고갱과 함께 생활하며 겪은 비극적인 사건은 그의 예술 세계에 깊은 상처를 남기며, 그 후 작품에 드러나는 고흐의 내면적 고뇌와 불안감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 착한 사마리아인(들라크루아 원작) |
•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1890년)’ 1890년 반 고흐는 오베르에서 70일 동안 무려 80여 점의 유화를 그렸다. 이 시기 작품들은 남프랑스에서의 밝은 노랑과 빨강에서 차가운 녹색과 파란색으로 변화했으며, 독특한 화풍으로 풍경을 표현했다. 또한 고흐는 라부 부부의 여인숙에 방을 얻어 살면서 가쉐 박사의 치료를 받았다. 당시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도 가쉐의 환자였다고 한다. 고흐는 종종 그림을 가쉐 박사에게 선물했다. 1909년 가쉐 박사는 사망했는데 그의 고흐 컬렉션 중 10점의 작품은 가격이 10억 달러 이상 나갈 것으로 평가받았다.
고흐와 그보다 3살 어린 동생 테오는 1857년 이래 무려 7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테오는 고흐에게 항상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1879년 10월 15일, 고흐가 테오에게
“이번에 네가 다녀간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 말해주고 싶어서 편지를 쓴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우리 두 사람 모두 아직은 산 자의 땅에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너와 함께 산책을 하니 예전의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삶은 좋은 것이고, 소중히 여겨야 할 값진 것이라는 느낌 말이다.”
-1888년 10월 24일, 고흐가 테오에게
“지금 바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든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버려다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1890년, 테오가 고흐에게
“가엾은 형, 정말 안타까워. 우리는 드디어 귀여운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왜 형은 여전히 괴로움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일까. 신은 형에게 대체 뭘 원하시는 걸까.”
-테오가 어머니에게
“형의 죽음이 제게 얼마나 큰 슬픔을 안겨주었는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저는 평생 이 슬픔을 짊어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제 와서야 형의 작품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젠 늦었습니다. 형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형이었습니다.”
(-도서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그림과 편지들』(더모던 펴냄) 中)
↑ 식당 내부 |
테오의 아내 요한나는 고흐와 테오의 연이은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한 살도 안 된 아들 빈센트 반 고흐 주니어, 그리고 무명 화가 고흐의 그림 수백 점이었다. 다행이도 요한나는 영어, 프랑스어도 익숙하고 현명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1892년 네덜란드 뷔파 화랑과 올덴젤 화랑에서 고흐의 전시회를 열었고 1905년에는 스데델리크 뮤지엄에서 484점의 작품을 전시한 대규모 회고전도 열었다. 이때부터 고흐는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며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또한 요한나는 고흐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고흐와 테오가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만들었다. 1914년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로 출간했고 그해 빈센트와 테오의 무덤을 합장했다. 이어 요한나는 영문판 책을 만들기 위해 직접 번역 작업에 나섰다. 526편의 번역이 끝난 뒤, 요한나 역시 세상을 떠났다. 고흐의 조카이자 테오의 아들 빈센트 반 고흐 주니어는 물려받은 큰아버지 고흐의 그림을 네덜란드 정부에 기증하여 1973년 ‘반 고흐 미술관’을 세웠다.
↑ 양파가 담긴 접시 정물화 |
고흐는 미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고흐는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 등 네덜란드 거장의 작품에서 거친 붓 터치, 뚜렷한 음영 등을 익혔다.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이에서 영감을 얻는 것은 더딘 학습이었지만 그에게 대신 독창성을 안겨주었다. 고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화가는 밀레였다. 구필 화랑에서 복제된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을 보고 충격과 감동을 받은 고흐는 이후 그를 ‘밀레 사부’라 불렀다. 물론 고흐는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거나 기법을 흉내내지 않았다. 오히려 밀레가 그림의 대상으로 삼은 자연, 그 속에 너무나 평범하게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집중했다.
밀레가 고흐에게 ‘사부’였다면, 고갱은 고흐에게 ‘충격’이었다. 고흐는 일종의 미술공동체를 꿈꿨다. 이에 테오는 고갱에게 고흐가 가 있는 아를 행을 권유하고, 1888년 10월 고갱은 아를로 와 고흐와 함께 생활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과 성향은 너무나 달랐다. 도시적이고 오만한 고갱과 내성적이고 불안정한 정신의 고흐는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각자의 독창성과 예술혼은 불 같았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깨진 것은 고갱이 고흐에게 선물한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작품이다. 그림을 보고 고흐는 고갱이 자신을 정신병자라고 조롱했다고 여겼다. 그림 속 해바라기는 시들었고, 그림 속 고흐의 눈은 흐리멍텅해 보였으며 붓은 너무나 가늘었다. 고흐는 고갱에게 술잔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12월 23일,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른 고흐는 면도칼을 들고 고갱을 노려보았다. 고갱이 ‘고흐가 자신을 찌를 듯이 노려봤다’고 회고했던 이 사건 후 고갱은 고흐를 떠났다. 고흐는 고갱이 영원히 자신과 공동체에 머물 것이라 생각했지만 고갱은 아를에 올 때부터 시간이 흐르면 떠날 생각이었다. 너무나 다른 성향으로 인해 두 거장의 만남은 비극이 된 것이다.
↑ 슬픔에 잠긴 노인 (영원의 문에서) |
고흐의 그림은 지독하게도 안 팔렸다. 생전에는 단 한 점 팔렸다. 1890년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벨기에 여류 화가 안나 보흐가 400프랑에 구입했을 때다. 고흐가 테오에게 ‘왜 내 그림을 팔아주지 않느냐?’고 말하자, 테오는 ‘형 그림은 너무 어둡고 요즘 경향인 인상주의 그림이 아니라 팔기 어렵다’고 답했다. 그렇게 고흐는 작품 하나 팔지 못하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의 사후 1930년대부터 고흐는 거장이 되고,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되었으며, 그의 그림은 미술사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1987년 소더비 경매에서 ‘붓꽃’은 8,000만 달러에 팔렸고 ‘가쉐 박사의 초상’은 1990년 5월 크리스티즈 경매에서 일본의 사업가 사이토 료에이에게 무려 8,250만 달러에 팔렸다. 그리고 최근 2024년 9월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정박한 배’는 약 365억 4,700만 원에 경매되었다. 현재 박물관과 미술관 소장품, 개인소장품 등이 경매에 나올 경우 약 900여 점의 회화, 1,100여 점의 습작 등을 모두 합치면 그 금액은 무려 1,0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 양파가 담긴 접시 정물화 |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형이 죽자, 고흐는 항상 자신이 형을 대신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은 그가 ‘죽음’이란 단어에서 평생을 헤어나지 못한 시작이었다. 1868년 15세가 된 고흐는 학교를 갑자기 자퇴했다. 그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고흐의 연구가들은 이때 고흐의 집안 내력인 정신병력이 발생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현대에 들어와 네덜란드 그로닝언 의료센터 연구진들이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속 각종 의료 및 병에 대한 기록을 분석한 결과 그가 금주로 인한 망상증, 조울증과 경계성 인격 장애, 유전적 뇌혈관 장애로 인한 측두엽 간질, 즉 뇌전증이 있었을 것이라 밝혔다. 이로 인해 고흐가 평생을 불안, 망상, 악몽, 환각 등에 시달렸으며 알코올, 영양실조, 수면 부족, 정신적 불안과 탈진 등이 고흐의 병을 더 부추겼다고 평가했다.
1890년 7월 27일 오베르의 성 뒤의 밀밭, 고흐는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쏜다. 하지만 총알은 심장을 빗겨나고 척추에 걸렸다. 고흐는 1.6km를 피를 흘리며 걸어서 라부 부부의 여관으로 돌아왔다. 라부 가족이 피를 흘리고 신음하는 그를 발견했고, 곧바로 가쉐 박사가 달려와 고흐의 가슴에서 총알을 빼냈다. 다음날 테오가 왔을 때 고흐는 방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모두 고흐가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미 총상으로 인한 감염으로 위독했던 고흐는 괴로워하다가 결국 테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난 왜 이렇게 잘하는 것이 없지? 스스로에게 총을 발사하는 것마저도 실패하다니”라고 말한 고흐는 그렇게 자살 시도 이틀 뒤인 1890년 7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불행한 천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불멸의 화가 반 고흐’展(사진 MBN, HMG) |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기간: 2024년 11월 29일 ~ 2025년 3월
시간: 화~일요일 10:00~19:00
주최: MBN, HMG
[글 권이현(라이프 칼럼니스트) 사진 및 이미지 제공 MBN, HMG]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57호(24.12.03)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