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 / 로이터 |
굵은 회색 강력 접착테이프와 테이프에 옴짝달싹 못하는 노란 바나나 한 개.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의 전부입니다.
지난 2019년 미국 마이애미 아트페어에서 대중에 처음 공개됐는데 작품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됐지만, 이 바나나를 먹는 행위로 더욱 유명세를 탔습니다.
한 행위 예술가가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나나를 떼어서 먹어버린 겁니다. 이 또한 행위예술이라면서요.
당시 이 작품, 12만 달러, 한화로 약 1억 4,000만 원에 팔렸던 터라 '1억 바나나'를 먹어 치웠으니 배상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갤러리 측은 아무렇지 않게 새 바나나를 다시 붙여 놨습니다. 바나나는 발상일 뿐, 작품이 파괴된 게 아니라는 게 갤러리 입장이었습니다.
↑ 작품 '코미디언'이 경매장에 등장했다 / 로이터 |
논란 속에 지난해 4월 우리나라에 이 작품이 나타났습니다. 서울 용산구의 리움 미술관에 전시된 건데요,
이때도 서울대 미학과의 한 학생이 바나나를 떼어먹고는 껍질만 붙여 놓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침을 안 먹고 와서 배가 고팠다"며 작품 '코미디언'을 먹어 치운 건데, 역시 미술관과 카텔란 모두 이 학생의 행동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경매장에 등장한 코미디언, 이번엔 620만 달러, 한화로 무려 86억 7,000만 원에 팔렸습니다. 경매 전 최저 추정 가격이 100만 달러로 예상됐지만, 이를 가뿐히 6배 뛰어넘은 겁니다.
↑ 기사 댓글 캡처 |
그러자 대다수의 누리꾼들은 "우리 집 바나나 만 원에 팔게요", "수박, 포도, 귤, 멜론, 사과, 배 차례대로 다해라. 예술이란 게 참말로 포장이 좋구나", "따라하지도 못할 작품이라면 양보에 양보에 양보해서라도 이해하겠다", "내가 바나나 1000개하고 회색 테이프 1000개 줄 테니까 10억만 갖고 와라", "테이프 붙인 바나나가 86억이라니. 아무리 예술이라고 이해하려 해도 납득 불가"라며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86억 원 넘게 팔린 이 바나나가 과일 가판대에서 500원에 구매한 바나나라는 외신 보도에 비판은 더 커졌죠.
반면 "이제 저 바나나 모르는 사람이 없지. 몇십 억 가치 하는 작품이 된 게 맞다"라며 유명세에 비례해 값어치가 있다는 반박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86억짜리 바나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카텔란 작품 '코미디언' 전시 관람 중인 관람객들 / 로이터 |
먼저 전문가들은 이 바나나로 인해 토론장이 열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미술 작가로도 활동 중인 성희승 K미술연대 대표는 작품 '코미디언'에 대해 "사람들의 사고를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바나나는 일상적인 사물이지만 그것이 미술관에 붙어 있었을 때 또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며 "이게 현대미술의 묘미"라고 말했습니다.
정은진 국제갤러리 어소시에이트 디렉터도 "카텔란의 작품은 호평이 되었든 혹평이 되었든 수많은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되었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갈릴지언정 이 작품이 다양한 사람들을 이러한 현대미술의 담론으로 초대하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해냈음에는 이견이 없다"며 "관객이 작품의 일부를 먹거나, 인터넷 밈으로 확산시키는 등 대중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미 제 각기 작품에 대해 반응을 했으며 이러한 반응 자체가 작품의 연장선 상에 있는 셈"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성희승 대표는 "한국에서도 이우환 작가님 같은 경우 큰 캔버스에 물감 한 번 쫙, 선 하나 그리시고 몇십 억의 가치가 있는데 (대중들이 보기엔)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일 것 같다"면서 "이처럼 지금 현대미술의 흐름을 보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들이랑 한국 미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과 좀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국 미술 교육의 한계를 짚기도 했는데요,
정준모 미술평론가도 성희승 대표처럼 현대미술이 대중들을 설레게 하는 미술과 다르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풍경이든 사람이든 정물이든 사실과 닮은 그림을 제일 편안하게 생각하고, 그런 그림이야말로 미술이라고 여긴다는 게 정준모 평론가의 분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카텔란의 작품이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 / 로이터 |
전문가들은 카텔란이 바나나를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건 결국 "예술? 별 거 아니야"라는 점에 대해서도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정준모 평론가는 "예술에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대단하게 가치를 두는 사람들한테 '웃기고 있네. 이 바보들'이라고 외치는 작품"이라며 "어떤 작품이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 다들 아름답다고 하니까 나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일 수 있다"면서 "그럼 아름답다는 건 뭘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원래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아름답게 느끼는 걸까 아니면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에 아름다운 걸까'라는 질문을 남기는 게 카텔란의 작품이라는 겁니다.
정은진 디렉터 또한 "평범한 바나나를 수백만 달러의 가치로 전환한 이 작품은 미술 세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가치 판단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며 "부패하기 쉬운 바나나가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현상을 보며, 개개인은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나아가 개념과 아이디어, 비물질 등의 가치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현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비판적으로 재고해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코미디언'이 고가에 거래되는 건 카텔란의 이러한 의도와 달라졌다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정준모 평론가는 "쉽게 얘기하면 이거 사는 사람은 바보라고 써 붙여 놨는데 서로 사겠다고 덤비면서 카텔란의 저의가 완전히 무시됐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사
[윤혜주 디지털뉴스 기자 heyjude@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