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리단길’로 불리는 많은 장소 가운데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핫한 길은 어디일까? 바로 ‘용리단길’이라고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숱하게 많았던 길들 중 용리단길은 가장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길의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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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가게들이 늘어선 용리단길(사진 서울관광재단 제공) (매경DB) |
한국의 핫 플레이스는 ‘길’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익히 알고 있는 가로수길이 대표적 사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인기를 끌더니 2000년대 초반 들어 서울의 가장 트렌디한 명소 중 하나가 됐다. 아무튼 2000년대 초반 가로수길 골목에는 핫하고 힙한 가게들이 즐비했다. 그래서 패션 피플들이 모여들었고, 셀러브리티들도 꽤나 보였다. 하지만 흥하는 공간에는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사건이 가로수길에도 도래했다. 바로 ‘젠트리피케이션’이라 불리는 거대한 자본주의적 그림자였다. 건물마다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간판이 걸렸다. 거리의 풍경을 아티스틱하게 변화시켰던 젊은 자영업자들은 다른 길을 찾으러 떠났다. 그렇게 가로수길의 영광은 저물어버렸다.
나는 2000년대 중후반의 시기를 이태원 언저리에서 보냈다. 그곳은 내 삶의 보금자리이자, 일터였고, 활동 근거지였다. 내가 살던 곳은 경리단길이라 불렸다. 200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경리단길은 전혀 핫하지 않은 해방촌 건너의 동네였다. 다만 외국인들이 꽤 거주하고 있었기에, 그 길의 중간 즈음에는 그들이 종종 모여드는 바(bar)도 하나 있었고, 카페도 두어 개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대한민국 ‘길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는 상징적 아이콘이 되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들고 대문을 열었다. 그 앞으로 숱한 사람들이 모바일 속 지도를 들여다보며 바쁘게 어딘가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핫플레이스로서의) 경리단길 전성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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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사진 픽사베이) |
그 당시 빠르게 경리단길의 유행이 시작됐다. 국군재정관리단(이전 이름이 ‘육군중앙경리단’이었다) 정문에서부터 그랜드 하얏트 호텔 정문까지 이어지는 높은 언덕길과 그 밑단 골목에까지 새로운 가게들로 그득했을 정도였다. 주말이면 좁은 길은 인파로 넘쳐났고, 2차선의 좁은 도로는 차량 정체로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유행도 금세 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도 역시, 이른바 땅값 논란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의 평균 시세가 많게는 10배까지도 올랐다고 했다. 그 말은 자영업자들의 월세가 천정부지로 치솟음을 의미한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맥주 팔고, 음식 팔아 그 높은 세를 부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핫하고 힙한 한국의 길은 어디일까?
가로수길과 경리단길이 부흥하는 사이, 대한민국은 ‘길’의 천국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가로수길에서 밀려난 이들이 그 후면거리로 서식처를 옮겼다. 세로수길이 생겼고, 샤로수길이 탄생했다. 샤로수길은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2번 출구부터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 이 길은 서울대 정문의 상징적 조형인 ‘샤’와 가로수길의 어원이 합쳐지며 생겨났다. 여전히 세로수길은 성업 중이고, 샤로수길은 대학가의 분위기를 깔고 앉은 채 존재하고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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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로수길에 위치한 일본라멘집의 외관(사진 서울관광재단 제공) |
강북에서 생겨난 망리단길도 길 트렌드에서 빼놓을 수는 없다. 망원동의 ‘망’자에 역시 경리단길이 합쳐진 길이다. 이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의 또 다른 음영을 보여주는 트렌드다. 홍대에서 밀려난 이들이 망원동까지 진출하면서 이곳이 핫플레이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가로수길과 경리단길의 ‘스핀오프’ 버전으로서의 기능 정도로 그쳤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가장 핫하고 힙한 ‘길’은 어디일까? 대부분 ‘용리단길’을 답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용리단길은 4호선 삼각지역부터 신용산역에 이르는 길을 일컫는다. 이 길은 특이하게도 중앙도로변을 따라 1겹, 다음 블록의 2겹, 다 다음 블록의 3겹 정도에 이르기까지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분위기의 가게들이 하루가 멀 만큼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3년 전쯤, 용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막 지어졌고, 하나둘씩 새로운 분위기의 업장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길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최고의 핫 플레이스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 길을 보면서 과거 길들의 흥망성쇠 이유를 명확하게 깨닫는 중이다. 자본주의적 접근 외에도 길이 가진 고유의 지형적 특성이 길의 생명을 어떻게 앗아갔는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용리단길의 상권을 먼저 분석해보도록 하자. 이곳에는 일단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셔야 하는 회사원들이 즐비하다. 아모레퍼시픽이라는 대기업 외에도 주변의 수많은 빌딩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앉아 있다. 또 현재 이곳에는 대통령실 및 국방본부, 합동참모본부 건물이 있다. 이 건물 안에도 수많은 직업 군인들이 있다. 이들은 역시 점심 시간만 되면 식사를 위해 길 위로 쏟아져 나온다. 용리단길이 평일 낮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이들이다. 직장인들이 밥을 사먹고, 커피에 지갑을 연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면 이들과 더불어, 길의 유행을 듣고 삼삼오오 약속 잡아 모이는 이들로 붐비며 화려한 밤의 길이 개막된다. 주말은 유동인구로 넘쳐날 판이다. 한마디로 용리단길은 1주일 기준으로 모든 나날이 번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용리단길은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약간의 공영 주차장 이외에도 대형 빌딩 및 용산 아이파크몰 등에 유료 주차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걸 용리단길에서 해결하고 몇 블록만 걸어가면 아이파크몰에서 쇼핑도 가능해진다. 이런 요소들을 과거에 내가 거주했던 경리단길에 잣대로 들이대면 결과는 명약관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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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사진 서울관광재단 제공) |
경리단길에는 재정관리단의 직업 군인을 제외하면 직장인이 거의 없다시피 한다. 대부분 거주구역이 많다. 동네 장사로만은 트렌드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동시에 경리단길은 끊임없는 언덕 길로 도보 여행이 힘들 뿐더러, 주차를 할 공간 역시 거의 없다. 무엇보다 최근 트렌드에 부합하려면 ‘놀이 공간의 기능’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경리단길에는 유흥은 있되, 놀이가 없었다. 이게 경리단길 퇴색의 가장 주요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높아지는 월세에 가성비의 하락 또한 몰락의 한 요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서울관광재단은 올해 초 2024년 청룡의 해를 맞아 용의 기운을 받을 수 있는 서울 명소 나들이 장소로 용리단길과 샤로수길을 추천했다. 관악구의 청룡산 인근에 위치한 샤로수길은 서울대입구역 2번 출구 근처 골목길에서 낙성대역 방향으로 이어지는 골목 일대로, 서울대학교의 상징문인 ‘샤’ 조형물과 가로수길을 합쳐서 샤로수길이라 부르게 되었다.
용리단길은 용이 나타난 언덕이라 이름 붙은 ‘용산’의 대표적인 거리로, 신용산역부터 삼각지역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말한다. 골목골목마다 이색적인 음식점과 카페 등이 들어서며 MZ세대에게 소위 말하는 힙플레이스(힙한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용리단길의 대표 전시공간인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전시 및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용리단길 ‘레트로+트렌드=뉴트로’
용리단길의 폭발적 기세는 ‘뉴트로’ 무드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힙지로’라 불리는 을지로의 부흥을 떠올려 보자. 을지로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완벽한 레트로의 상징이기도 했다. 간판 가게, 조명 가게, 공구 가게가 즐비했던 과거의 상업지구가 현대의 ‘뉴트로’ 붐을 타고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디지털 네이티브를 위시한 새로운 세대에게 다가갔다.
힙지로의 뉴트로 무드가 용리단길 트렌드로 이어졌다. 지금 용리단길은 재개발 구역의 바이브와 새롭게 들어선 신축 건물 사이에서 묘한 교집합을 형성해내고 있다. 을지로가 있는 그대로의 레트로는 그 자체를 무기로 삼았다면, 용리단길은 레트로에 트렌드를 뒤덮어 조금 더 새로운 뉴트로를 자아낸다. 이곳에는 일본 하라주쿠 뒷골목에 있을 법한 선술집을 만날 수 있고, 정갈한 세팅의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접할 수 있다. 또 세련된 분위기의 한우구이를 맛볼 수 있고, 야단법석의 디제잉이 곁들여진 바 문화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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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리단길에 위치한 베트남 음식점(사진 서울관광재단 제공) |
이처럼 용리단길은 무국적 시대의 카오스가 난무하는 곳이다. 좋게 말하면, 다문화 시대를 완벽하게 접할 수 있는 시티라이프를 제공한다고 할까?
그래서 한동안 용리단길의 열기는 쉽사리 식지 않을 것 같다. 이곳이 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구역의 부동산은 용암처럼 달아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은 그 인상을 감당할 수 있는 매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평일의 직장인, 저녁의 술자리, 주말의 놀이공간으로서의 기능이 아직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넥스트 용리단길’은 어디일까? 단적인 예로 신용산이 부흥하면서, 한강대교 근방의 용산 지구도 함께 끓어오르고 있긴 하다. 힙한 곳이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핫해질지는 잘 모르겠다. 그 이유가 바로 용리단길의 요인들에 모두 다 들어있다. 새로운 ‘OO길’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현재 사람들이 용리단길에서 욕망하고 소비하게 하는 특징이 무엇인지 찬찬히 꿰뚫고, 분석하는 것이 좋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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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사진 픽사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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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주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사진 서울관광재단, 픽사베이, 매경DB]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44호(24.8.27)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