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을 시작하고 절반이 지났다. 체력이 고갈될 것이란 애초 예상과 달리 몸과 마음에서 에너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체력적 한계는 없었다. 해발 4,200m에 달하는 오르막을 질주하는 동안 매 순간 순간이 개인의 최초 기록이자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것에서 순간을 즐길 줄 아는 태도를 잃고 싶지 않았으나, 트레킹 마지막 목적지에 닿았을 때는 밀려드는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 해발 4,200미터에 위치한 마르디 히말 전망대 |
↑ 전망대에서 바라다본 마차푸차레와 히운출리 산봉우리, 위치와 방향을 알려주는 나무 표지판 |
해발 3,000m를 넘어 하이 캠프(High Camp)가 위치한 해발 3,540m까지 도달하는 3일 차 트레킹. 하루 동안 가파른 오르막을 계속해서 올라야 하는 험준한 산행길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몸은 고되도 마음만큼은 즐길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행히 지난밤 어렵사리 샤워를 시도한 것이 컨디션 조절에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켰다.
↑ 로우 캠프로 가는 길, 로우 캠프 산장 풍경 |
로우 캠프에 도착해 이곳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려 했지만 잠깐의 휴식 후 일단 다시 가방을 들쳐 맸다. 하늘을 점차 뒤덮고 있는 구름 떼를 감안해 우선 빨리 이동하는 것이 낫다는 현지인 가이드의 판단에서였다. 다음 마을인 바달 단다(Badal Danda)까지는 약 1.6km 거리, 1~2시간가량 더 산행을 이어갔다.
바달 단다에 도착한 뒤에도 이곳 산장들 가운데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지점까지 그야말로 가파른 오르막을 끝도 없이 올라야 했다. 그 끝에 이르러 마침내 꼭대기 산장에 도달했다. 마을 전체를 굽어살피는 풍경에 압도당하고서야 진정한 자유가 심신을 에워쌌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오르막에도 반드시 끝이 있다. 오르고 또 오르면 그 끝에서 맛보는 자유는 온전히 오르막을 오른 자의 것이 된다.
↑ 해발 3,540m에 위치한 마지막 산장 마을, 해발 3,286m에 위치한 바달 단다 마을 |
다행히 큰 소낙비는 피했지만 가늘어진 빗줄기가 좀체 잦아들지 않는 상황, 무턱대고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판단 하에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트레킹 시작한 지 3일 만에 처음으로 비를 맞으며 산길을 걷는다. 바달 단다에서 이날의 마지막 목적지 하이 캠프까지는 약 3km 거리, 2~3시간가량 오르막을 또 오른다.
↑ 하이 캠프 산장에서의 저녁식사 |
이들 가운데 30kg에 달하는 짐 가방을 이마에 매단 채 이동하는 하리(Hari)가 가장 큰 목소리로 대화를 이끈다. 직업상 계절에 상관 없이 수십, 수백 번 산을 올라야 했던 이들의 대화를 오락가락하는 날씨나 높은 해발고도, 가파른 오르막 따위가 방해할 수 있을까. 침묵 속에서 빗소리와 함께 귓속을 간질이는 이들의 대화는 뜻하지 않은 평온함을 안겼다. 해발 3,500m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 비를 맞으며 하이 캠프에 올랐다. 하이 캠프로 향하는 깎아지른 절벽 길(사진 아래). |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하이 캠프 산장에 도착한 후 커다란 구름 떼로 뒤덮인 하늘은 좀체 산봉우리의 등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구름이 살짝 걷혔다 다시 덮이기를 수차례, 구름과 여행자들 간에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승부가 진행되었다. 짧은 기다림 끝에 일몰 직전 마침내 구름이 한발 물러나면서 얼굴을 내보인 거대한 산봉우리가 3일 차의 대미를 장식했다.
↑ 전망대에서 바라다본 마차푸차레와 히운출리 산봉우리, 마르디 히말 전망대로 가는 길 |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어둑어둑한 산길은 헤드 랜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작은 불빛이 커다란 이정표 역할을 한다. 광활한 무대 위 오직 주인공만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조명처럼 이 거대한 산길 위에 여행자를 비춰주는 작고 소중한 불빛이 광명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깜깜한 배경 가운데 저 멀리 작은 점과 같은 불빛이 일렬로 오르막을 오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벽 4시보다 더 일찍 출발해 앞장서 산행을 시작한 사람들, 그렇게 또 하나의 작지만 커다란 이정표가 우리의 발걸음을 비춘다.
↑ 해발 4,200미터에 위치한 마르디 히말 전망대. 같은 듯 다른 길을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
이럴 때일수록 최대한 몸 상태를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떼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트레킹은 상대와의 경쟁이나 게임이 절대 아니다. 나의 속도, 나의 생각, 나의 경험이 하나둘 쌓이며 마침내 목표와 합일을 이루는 순간을 향유하는 것. 또 한번의 최고의 순간, 나만의 길은 그렇게 현실과 만났다.
결국 해발 4,200m 마르디 히말 전망대에 올랐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청명한 날씨를 배경으로 눈 덮인 산봉우리가 활짝 얼굴을 내보이며 여행자를 맞아주었고, ‘지구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히말라야산맥의 풍광은 새벽 산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기에 충분했다.
↑ 하산 과정에서 발견한 마르디 히말 표지판 |
전망대에서 만난 다른 현지인들 또한 사로지와 같은 의견을 냈다. 이들의 판단에 따라 우리 일행은 모험 대신 하산을 택했다. 선택에 아쉬움은 없었다. ‘최선의 길’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트레킹은 최선의 길을 찾는 여정과 다름없다. 트레킹 시작 첫날부터 전망대에 두발 닿을 때까지 최선이 아닌 순간은 단 한번도 없었다. 최선을 다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일, 이보다 값진 트레킹의 결과물이 있을까.
↑ 같은 듯 다른 길을 따라 하산을 시작, 다시 하이 캠프 산장 마을에 닿았다. |
같은 길이지만 절대 같지 않은, 완전히 다른 길을 내려간다. 로우 캠프까지 해발 1,000m가량을 거침없이 내려가는 동안 그제서야 예상치 못한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트레킹의 마지막 날도 아닌데, 안나푸르나산과의 작별이 가슴 시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산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뒤로 멀어져 가는 산은 금세 흐릿하게 초점을 잃었고 그것이 못내 아쉬워 속도를 조절하며 걸어야 했다. 하산은 작별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그 과정에서 깨우쳤다. 작별에도 평화롭고 평온함이 깃들 수 있을까.
↑ 비포장도로의 시딩 마을 초입 전경, 비와 안개를 뚫고 나아간 마지막 산행 |
트레킹 여정의 마지막 날, 마지막 아침식사를 한다. 지난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침까지도 세차게 이어져 산장에 모여든 여행자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일단 바깥 상황에 대한 염려는 내려놓고 식사에 집중한다. 산장 식당의 나무 장작에서 피어 오른 불꽃이 온기를 뿜어내는 지금의 이 분위기를 아쉽지 않게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당장의 해야 할 일.
티베탄 브레드(Tibetan Bread)와 채소볶음, 삶은 달걀이 한 접시에 나오는 산장의 아침식사는 장소는 달라도 그 맛과 모양은 동일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디 히말 코스에 위치한 모든 산장은 ‘마르디 히말 투어리즘 매니지먼트 및 상인회’가 조직하고 설정한 매뉴얼에 따라 운영되기 때문이다. 어느 산장을 가더라도 음식 메뉴와 가격, 숙박비 등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 티베탄 브레드와 채소볶음, 삶은 달걀이 한 접시에 나오는 산장의 아침식사 |
마지막 날의 트레킹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에 가까웠을 것이다. 로우 캠프에서 이날의 최종 목적지인 시딩(Sidhing) 마을까지 약 4km 거리, 내리막길이 대부분인 데다 날씨가 맑았다면 산행은 2시간 안팎 소요됐을 것이다. 하지만 비를 맞으며 걷는 길은 발의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었고, 굵은 빗줄기를 피하느라 여러 번 지붕 아래 몸을 숨겨야 했기에 소요시간은 늘어만 갔다. 장점도 물론 있었다. 정글 숲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산과 작별해야 하는 타이밍 또한 더디게 흘러갔기에.
↑ 비와 안개를 뚫고 나아간 마지막 산행 |
자갈길 위를 달리는 차량의 덜컹거리는 움직임을 느끼며 떠나는 아쉬움과 새로운 목적지의 기대를 동시에 품는다. 문명도시에 가까워질수록 산을 떠난 아쉬움은 더
언젠가 반드시 안나푸르나를 다시 찾을 것이다. 다음을 기약하는 마음이 간절하기에 기쁨이 섞인 아쉬운 감정임이 분명하다. 안녕, 나의 안나푸르나.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4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