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삶에 대한 의지가 있는한 인생은 고통이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행복은 고통 겪어야 알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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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만 부 이상 팔린『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강용수 지음 / 유노북스 펴냄) |
#1. “나의 탐구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다.”(칼 구스타프 융) “내가 철학자가 된 계기는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했다.”(프리드리히 니체) “나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여태껏 한 번도 몰랐던 강력한 기쁨을 만끽했다. 그는 모든 인간 중 가장 위대한 천재다.”(톨스토이)
#2. 쇼펜하우어가 활동할 때 사상계 주류는 헤겔 등이 주도했다. 쇼펜하우어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비판했다. ‘무능하고 간사한 대학교수 패거리’, ‘현학적이고 몽상적인 이론가’라고 말하며 독일 청년들이 대학에서 헤겔 사상을 공부하느라 두뇌를 손상시킬 정도로 인생을 허비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자신만이 ‘칸트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이어받았다’고 말했다.
#3. 쇼펜하우어는 생전 의형제처럼 지냈던 변호사 빌헬름 그비너에게 자신의 사후를 부탁했다. 쇼펜하우어는 그비너에게 묘비에 “내 이름을 빼고는 아무 것도 새기지 말라”고 유언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원 묘지에 위치한 쇼펜하우어 묘지석에는 오직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라는 이름만 새겨져 있다. 묘비에 꼭 있는 생몰년조차 없다. 생전 쇼펜하우어는 ‘어디에 묻혀도 후세 사람들은 나를 발견할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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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 박제현 옮김 / 페이지2북스 펴냄) |
쇼펜하우어가 지금 이 시대에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말뿐인 위로’를 건네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괜찮아, 좋아질 수 있어, 잘하고 있어, 다 잘될 거야’ 등등의 영혼 없는 위로와 격려 대신 그의 철학은 ‘인생은 고통이다’ 같은 냉정한 현실 인식 위에서 시작한다. 그는 그 토대 위에 ‘그래서 이 고해의 바다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데’라는 냉철한 해결책을 전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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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펜하우어 [이미지=픽사베이] |
이런 어머니 모습에 실망과 혐오를 느낀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와 헤어진다. 쇼펜하우어는 21세 성인이 되자 어머니를 상대로 유산 상속 소송을 해 막대한 유산을 받아냈고 덕분에, 평생 돈과 직업에 대한 걱정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30세의 쇼펜하우어는 일생의 역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펴냈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학계와 시장의 반응은 전혀 없었고, 책은 1년 동안 불과 100여 권밖에 팔리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실망을 넘어 당대 학계에 강한 혐오를 드러냈다. 그리고 1819년 베를린 대학교의 강사직을 지원했다. 그러면서 당대 최고 학자 헤겔과 같은 시간에 강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강의는 곧 폐강되었다. 헤겔의 강의실은 학생들이 가득했지만 쇼펜하우어의 강의실은 텅텅 비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와 같으며, 어떻게든 끝마쳐야 하는 힘든 과제와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인생을 견뎌 냈다’라는 말은 멋진 표현이다. 세상이란 실은 지옥이다. 인간은 한편으론 들볶이는 영혼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 영혼 속의 악마이기도 하다.”-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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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픽사베이] |
1840년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로 덴마크 왕립학술원에 지원했지만 헤겔, 피히테 등을 비난했다는 등의 이유로 수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1851년 쇼펜하우어의 나이 63세에 펴낸 『소품과 부록』이 마침내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라이프치히, 본, 브레슬라우 대학교 등에서 쇼펜하우어 사상과 관련된 강의가 개설되고 그의 책이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당시 쇼펜하우어는 이를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소회를 밝혔다.
그의 70세 생일은 신문에도 기사가 실렸고 유럽 각지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찾아왔다. 1860년 9월21일, 쇼펜하우어는 냉수욕을 마치고 쉬던 중 식탁에 앉은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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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픽사베이] |
그는 세상과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보았으며 평생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로 금욕 생활을 했다. 그의 사후 재산은 자선단체에 기증됐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적이고 세상에 대한 비관적 시선은 냉철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평생 ‘무명의 이단아’처럼 지내다 63세에 비로소 세상에서 빛을 발했다. 학문과 사상에 대한 염원, 즉 세상이 그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기대와 현실 세상의 냉담한 평가 사이에서 그는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은 사유나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의지와 표상’이다. 여기서 ‘의지’는 우주의 근본으로 인간의 본질이며 모든 물질과 현상의 근원이다. 그리고 ‘표상’은 이 의지의 표현이다. 또한 의지는 모든 존재에 내재된 실체이다. 즉 이 의지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구와 불만의 원천이다. 인간의 의지는 어떤 욕구가 채워져도 다시 새로운 욕구가 일어나게 한다. 결코 충족이란 이뤄지지 않는다. 쾌락이나 행복 등은 고통과 불행이 사라졌을 때 찾아오는 것으로 ‘잠깐 동안의 고통의 부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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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 김욱 편역 / 포레스트북스 펴냄 )] |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에는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봤다. 즉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쾌락을 위한 삶’,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도덕을 위한 삶’,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는 예술을 위한 삶’, ‘자신의 욕망을 초월하는 철학을 위한 삶’. 이는 욕망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행복’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어차피 ‘인생이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이 욕망이 ‘잘 살려는 의지’라고 본 것이다. 이는 대단히 현실적이다. ‘고통과 고해의 바다 같은 인생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행복은 고통을 겪어야 맛볼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 통찰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00년 전 고독했던 천재 사상가의 이야기는 마치 지금의 우리 삶을 직시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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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펜하우어 인생 편의점』(쇼펜하우어 지음 / 김문성 번역 / 스타북스 펴냄) |
[글 권이현(라이프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각 출판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21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