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방콕 여행 ①
10년 만에 방콕을 다시 찾았다. 그간 도시는 얼마나 변화했을지 궁금하다. 여전히 쉼 없이 흐르지만 정체성을 정확히 내보이지 않는 도시. 부정적이면서 긍정적이고, 화려하면서 소박한. 그렇기에 방콕은 다시 한번 찾아야 할 곳이다.
↑ 낡은 동네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
변하지 않는, 그러나 결국 변화하는 곳
수완나품 공항에서 나오자 후텁지근한 습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불쾌감보단 안도감이 먼저다. 공항 지하층에 주차된 S1버스는 10년 전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강산도 새 옷을 갈아입는다는 세월, 다시 찾은 방콕 또한 그러할까? S1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이동하는 동안 차창 밖에서 높다랗게 뻗어 있는 현대식 빌딩이 그 물음에 답이라도 되는 듯 위용을 뽐낸다.차창 밖 방콕은 현대식 도시의 낯빛에 가까웠지만 동이 트고 난 뒤 도시는 금세 과거로 돌아가 버린다. 오히려 그 모습이 친숙해 ‘진짜 방콕에 왔구나’ 싶은 반가움마저 들었다. 방콕의 급속하고 과도한 성장은 도리어 도시계획 부재를 낳았고 무질서한 도시 경관과 인프라 부족, 대기오염을 초래하는 상황에까지 치달았다. 이렇게 혼잡한 도시 질서는 예나 지금이나 방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방콕의 대중교통 |
변하지 않은 방콕의 거리, 그리고 사람들의 살아가는 행위들, 그리고 이를 아우르기엔 벅차기만 한 도시의 기반 시설들. ‘도시는 변화하는가’, ‘방콕은 변화하는가’라고 되묻는다면 물론 도시는 변화하고 방콕 역시 변화한다. 다만 방콕의 변화는 ‘변하지 않은 도시’를 만들어내는 힘에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을 향유하는 것 또한 변화니까.
↑ 방콕의 거리 풍경 |
대마 합법화 그 이후… 변치 않는 ‘정제된 카오산’을 원한다
10년 전 기억을 더듬어 오래된 골목을 통과하고 나서야 카오산 로드(Khaosan Road)의 서막을 맞닥뜨렸다. 지난 시간 동안 방콕을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백패커(Backpacker)의 성지로 불리는 곳, 전 세계 배낭여행 문화가 나고 자라는 그곳, 방콕 중심부에 위치한 약 410m의 길이로 조성된 카오산 로드는 세월의 변화가 무색한 모습이다.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어수선한 분위기는 물론 길 주변 싸구려 네온사인, 차량과 툭툭(Tuk Tuk, 3륜 오토바이 택시), 리어카 상인들로 뒤섞인 소음까지도. 무질서한 주변 환경이 에워싸고 있는 카오산 로드는 오랜 세월에 걸쳐 방콕 여행의 거점 장소로서, 도로가 갖는 상징성과 중요성은 변하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른다.
↑ 카오산 로드의 밤을 밝히는 노천 식당 모습 |
합법화 이후 이제 태국 거리 카페와 노점에서는 모든 종류의 마리화나 제품을 공개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심지어 화학 비료를 쓰지 않는, 즉 ‘오가닉(Organic)’ 제품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선전문구를 내걸고서. 카오산 로드는 물론 그 변화의 거점이 되는 장소다. 한 가게 건너 하나씩 ‘오가닉’이란 단어가 카오산 로드의 정체성을 새로 쓰는 아이러니한 풍경이 펼쳐진다.
↑ 카오산 로드의 먹거리들과 밤을 밝히는 노천 식당 모습 |
이 한 가지 변화를 제외하면 카오산 로드는 여전히 활기 넘치는 밤을 보내기에 제 역할을 하는 장소다. 일몰 이후 거리에 차량통행이 통제되면 리어카를 끌고 나온 상인들로 순식간에 길은 노천식당이 빼곡히 들어찬다. 술집과 바에서 들려오는 라이브 뮤직은 노천식당을 여느 레스토랑 못지 않게 흥겨운 분위기로 탈바꿈시킨다. 작고 좁은 테이블과 의자에 엉덩이를 일단 붙이고 앉으면 찌는 듯한 무더위도 시끄러운 소음도 방해요소가 아니다.
↑ 합법화에 따른 새로운 거리 풍경 |
여행자를 에워쌌던 부정이 긍정으로 바뀌고 나면 ‘무질서가 질서를 만든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카오산 로드를 찾는, 찾아야 하는 이유다.
실제 ‘카오산(Khaosan)’은 태국어로 ‘정제된 쌀’을 뜻하는데, 19세기 이 거리에 쌀을 파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던 탓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불순물이 없어진 순수한 상태의 카오산, ‘정제된 카오산’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도로가 갖는 상징성이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려면.”
로컬의 길에서, 삼센 도로 산책
↑ 방콕에서 가장 오래된 길, 삼센 도로 주변, 강이 있는 풍경 |
이 길은 방콕의 흔한 로컬 동네와 닮은 모습이지만 그것 자체만으로 여행자의 구미를 당기는 특별함이 있다. 카오산 로드가 ‘여행자의 길’이라면 삼센 로드는 ‘로컬의 길’에 가깝다. 약 4.6km로 뻗어 있는 도시의 가장 오래된 길 위에서 오랜 세월 낡고 부서진 동네를 지키며 살아가는 로컬의 생활상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 낡은 동네를 지키며 살아가는 현지인들 |
카오산이 대놓고 여행자를 환영하는 식이라면 삼센은 수줍게 손을 내민다. 수십 년 전 카오산 로드에 여행 인프라가 하나둘 조성되기 시작했던 풍경이 최근 삼센 도로의 풍경과 맞아떨어진다.
↑ 마당과 테라스가 딸린 호스텔이 즐비한 삼센 도로 |
제 아무리 오래되고 낡은 주택과 건물일지라도 마당과 테라스, 발코니만 있다면 길을 향유하는 자유와 여유는 온전히 여행자의 몫이 된다.
↑ 골목에 숨어 있듯 자리한 모던 카페와 레스토랑 |
차오프라야 강의 다양한 얼굴
차오프라야(Chao Phraya) 강 일몰 구경은 예나 지금이나 방콕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코스다. 강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은 방콕의 무더위를 씻어내고 다시 에너지를 충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방콕의 상징 차오프라야 강은 남쪽에서 시작되어 비옥한 중앙 평야를 지나 약 365km에 걸쳐 태국 만까지 흐른다. 수백 년 동안 강은 사람들의 주요 생활터전으로서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이들의 환경과 일상이 번영하도록 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방콕이 ‘동양의 베니스’라는 칭호를 얻게 된 건 차오프라야 강의 영향이 컸다. 전 세계 대부분의 도시 중심지와 마찬가지로 방콕은 탄생 이후 강둑의 대부분을 넓히면서 수로를 통해 시민들의 이동과 정착, 삶의 방식이 이어져 왔다. 이곳 시민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지역과 지역을 오갈 만큼 배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 차오프라야 강의 아름다운 일몰 |
삼센 로드와 인접한 프라아팃 선착장에서 출발한 보트는 각각의 부두에 정착할 때마다 보트에서 타고 내리는 승객들로 인산인해다. 일몰 구경에 나선 관광객과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현지인들로 뒤섞인 상황. 방콕 최고의 명소 대부분이 강 주변에 위치하기 때문에 관광객 입장에서도 강을 건너는 일은 매우 중요한 활동 중 하나다.
↑ 방콕의 상징, 차오프라야 강 주변과 프라아팃 선착장 티켓 판매소 전경 |
여전히 물에 떠 있는 방콕의 시장
방콕 여행에서 차오프라야 강, 그리고 수상시장(Floating Market)은 많은 볼거리와 여행자를 끌어 모은다. 과거 태국 대부분의 공동체는 강변에 세워지며 규모를 확장해 나갔는데, 당시 수로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교통수단이자 경제활동의 중심지로 인식됐다. 수상시장이 조성됐던 14세기 초기만 해도 각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을 주민들이 물물교환 거래가 이뤄졌다.↑ 방콕이 간직하고 있는 예스러운 풍경, 수상시장 |
수백 채의 목조 가옥 사이에 차려진 시장 풍경, 전통 음식에서부터 공예품, 기념품, 의류 등을 판매하는 시장은 눈과 입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수상시장 전경은 이 도시에서 수로가 주요 무역로였던 초기 시대를 연상케 하는데, 21세기 현대 도시 방콕이 간직하고 있는 예스러운 풍경 가운데 수상시장은 최우선순위다. 어느 곳을 방문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콕 주변에는 여전히 많은 수상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 나무배를 타고 도심까지 이동이 가능한 탈링찬 수상시장 전경 |
강물에 떠 있는 시장, 배에서 물건이 오가는 풍경, 수백 년을 거쳐온 그 모습 그대로 계속 보아도 진귀한 광경이 틀림없다. 그 속을 비추면 여전히 강물은 흐르고, 삶은 지속되며, 개인은 성장한다. 틀림없이. 여행은 언제나 그렇게 완성되기에.
↑ 목조 가옥(우측 사진) 사이에 차려진 시장 풍경(좌측 사진) |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2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