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닮은 예술가들의 땅
자연·예술·맛집, 경기도 장흥에도 ‘삼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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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나아트파크 |
한동안 잊고 살았다. 송추, 일영 그리고 장흥. 한때, 수도권 제일의 유원지였던 그곳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해마다 여름이면 제일 먼저 생각나던 시원한 계곡과 그곳에 가야만 맛볼 수 있었던 탐스런 딸기, 무리를 지어 떠나던 MT. 그러나 한동안 장흥에 대한 기억은 계곡 양 옆 숙박업소들이 내뿜는 혼탁한 이미지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린이 놀이시설이 전부였다.
그랬던 장흥이 기억 속으로 다시 돌아온 건, 미술관 이야기 때문이었다. 장흥 계곡에 하나둘 미술관들이 들어서고 그곳에서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계곡을 따라 미술관과 박물관, 수목원과 휴양림 등이 줄줄이 늘어서면서 ‘장흥문화예술체험특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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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상호(여행작가) |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송추IC로 나와 장흥면행정복지센터 인근 장흥관광지 들머리에 선다. 단풍이 물들어가는 개명산 꼭대기를 바라다본다. 숲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석현천의 물소리가 청량하게 들리는 듯하다. 여기서부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말로만 듣던 미술관 여행을 시작할 생각이다.
‘토탈미술관’의 아이덴티티가 그대로, 가나아트파크
장흥 계곡 들머리에 서면 곳곳에 장흥이 ‘문화예술체험특구’가 되었음을 알리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1980년대, ‘토탈미술관’을 전신으로 하는 가나아트파크는 이제 미술관을 넘어 토털 예술 테마파크로 확장되었다. 젊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높던 ‘토탈미술관’은 2006년 가나아트센터가 인수하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미술관 명칭을 ‘장흥아트파크’로 바꾸고 일본 건축가 우치다 시게루에게 마스터플랜과 건축 디자인을 맡겨 본격적인 예술 공간으로의 면모를 갖췄다. 2008년 장흥이 문화예술체험특구로 발돋움하게 된 모티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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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옥상의 작품 ‘대지-어머니’ |
이후 장흥 계곡을 문화예술 공간으로 정착시키는 데 핵심 역할을 해온 ‘장흥아트파크’는 2015년 가나아트파크로 이름을 바꾸고 미술관, 조각공원, 아틀리에, 공연장, 전시관 등을 갖춘 문화예술 테마파크로 거듭나 지금에 이른다. 건물들이 신축과 증축을 거듭하면서 가나아트파크의 입구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다.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인데 별 모양의 커다란 흰색 텐트 구조물이 다행히 시선을 붙잡아준다. 세계적인 구조설계가 반 시게루의 작품인 야외공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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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미술관(위)과 목마놀이터(아래) |
파크로 들어서면 너른 잔디 마당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다양한 모양, 콘셉트의 조각 작품들이 서 있다. 극도로 단순화된 직육면체 형태의 건물들은 파랑, 빨강, 노랑 등 원색의 색채를 입혀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종합 예술공간으로 확장된 가나아트파크는 전시와 체험, 놀이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연령과 세대 구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입구로 들어가면 정면에 가나어린이미술관이 있다. 지상 2층, 지하 1층 미술관은 5개의 전시장으로 구분돼 있는데 데미안 허스트, 앤디 워홀, 무라카미 타카시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가득하다. 야외 조각공원에는 근대 조각 거장 부르델, 20세기 한국 조각을 대표하는 문신, 그리고 조엘 사피로, 필립 페린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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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어린이미술관 |
파랑색 외관의 피카소어린이미술관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드로잉과 판화, 도자기 작품 그리고 생전의 피카소를 카메라에 담은 앙드레 빌레르의 사진 작품 등이 전시 중이다. 옐로우 스페이스로 통하는 노랑색 건물은 ‘에어 포켓’이라는 텍스타일 놀이터로 관람객들의 인기를 모으는 곳이다. 섬유작가 토시코 맥아담이 뜨개질하듯 그물을 손으로 엮어 인간 친화적 놀이터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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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각공원 내 놓인 작품들 |
가나아트파크 건너편에는 장흥 문화지구의 터줏대감 격인 ‘두리랜드’가 있다. 5층 규모의 실내 놀이터와 실외 놀이시설을 갖춘 두리랜드에는 미니기차, 회전목마, 미니 바이킹 등의 놀이 시설과 미로체험시설이 있다. 어른들에게는 ‘언제 적 두리랜드’ 하는 신기함이 있겠지만 아이들에겐 요즘 놀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특별한 재미가 있는 곳이다.
Info 가나아트파크
위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17
운영 시간 평일 10:30~18:00, 주말·공휴일 10:00~18:00(*11~3월, 월요일 휴관)
‘예향’ 양주의 프라이드, 장욱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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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각공원 내 36.5도 인간-Blue |
가나아트파크에서 계곡을 따라 1km를 채 가기도 전에 두 개의 미술관이 길 양 옆으로 나란히 서있다. 양주시가 내세우는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과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이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은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 화가 장욱진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4년 4월에 개관했다. 장욱진의 고향은 충남 연기군이지만 그의 작업실이 오랫동안 옛 양주군에 있었다는 인연에서 비롯된 일이다.
장욱진은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의 거장으로, 평생 자연과 살면서 동화적이고 심플한 표현과 독창적인 색채를 통해 한국적 추상화라는 화풍을 일궈낸 화가다. “나는 심플하다”라는 그의 말대로 체면과 권위에서 벗어나려 애썼고, 아이와 어른들이 모두 좋아하는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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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호작도’를 모티브로 설계한 장욱진미술관과 내부, 조각공원의 돈키호테, 그의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는 영상실 |
미술관은 입구를 지나 조각공원을 거쳐서 들어갈 수 있다. 조각공원 안에는 민복진의 작품 ‘가족’과 ‘모자상’ 등 국내외를 대표하는 작가 30여 명의 작품 46점이 설치되어 있다. 조각공원을 공원 삼아 여유 있는 산책을 하기 위해 석현천 위 아담한 다리를 건넌다. 다리 건너 오른편에 눈부시게 하얀 건물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그리팅맨을 생각나게 하는 6m 높이의 ‘here’과 ‘어린 왕자’를 닮은 김정연 작가의 ‘추억이 담긴 집’ 조형물이 근사한 포토존을 만들어주고 있다.
마치 호랑이가 산속에 누워 편안히 쉬는 형상의 미술관 건물은 장욱진의 호랑이 그림인 ‘호작도’와 집의 개념을 모티프로 설계했다. 중정과 각각의 방들로 구성된 이 독특한 미술관은 2014년 ‘김수근건축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영국 BBC ‘위대한 8대 신설 미술관’, 한국건축가협회의 ‘올해의 베스트7’에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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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 시계방향)6m 높이의 조형물 ‘here’, 미술관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는 장욱진의 작품 ‘가로수’, 매표소 건물 천정에 펼쳐진 작품 ‘우주정원’ |
지하 1층, 지상 2층 미술관에는 벽화, 유화, 판화, 먹그림 등 장욱진미술문화재단으로부터 기증받은 작품 230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장욱진이 덕소 화실 벽에 그렸던 그림으로, 벽 자체를 떼어내 미술관에 기증, 영구 전시하고 있는 ‘동물가족’(1964)과 장욱진이 직접 그리고 골라 부인을 통해 일본 일련종의 불교단체인 고쿠쥬카이(國柱會)에 선물했던 ‘사람’(1962)도 있다. 2층 영상실에서는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함께 그의 대표작들을 디지털로 감상할 수 있다.
1층 야외 카페에 앉으면 석현천 너머로 조성된 조각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무들 사이로 설치미술 ‘돈키호테’와 파란색 그리팅맨을 닮은 ‘36.5도 인간-Blue’, ‘하늘로 날아간 마법사’ 등 독특한 콘셉트의 작품이 줄줄이 서있다.
한국의 대표적 조각가, 장욱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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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복진미술관 |
이번엔 길 건너 민복진미술관으로 갈 차례. 지난해 3월에 개관한 미술관으로 장욱진미술관처럼 ‘양주시립’이라는 수식을 달고 있다. 덕분에 입장 티켓 한 장으로 두 곳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은 양주 출신으로 한국의 대표적 조각가 민복진의 작품을 기증 받아 만들어진 공공미술관으로 1952년부터 2007년까지 50여 년간 창작한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한국 현대조각 1세대인 민복진은 어머니와 가족, 인간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한 작가이다. 추상미술이 확산되던 시기에도 구상조각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평생을 전업 작가로 살아온 그는 1960년대 초반까지 시멘트, 철사, 납 등을 사용하여 실험적 작품들을 만들었으나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돌과 브론즈 같은 정통 조각 재료를 사용한 인체 조각으로 사랑의 영속성을 조형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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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복진미술관 |
미술관에서는 지금 개관 1주년기념 상설전 ‘집’과 기획 전시로 ‘민복진과 전뢰진’이 열리고 있다. 1층의 기획 전시를 보고 2층으로 올라가면 민복진의 조각 작품이 가득 차 있다. 그가 기증한 421점의 작품 중 9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는 개방형 수장고를 만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 구상조각의 매력과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Info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위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93
운영 시간 10:00~18:00(*월요일 휴관) 양주시립민복진미술관
위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92
운영 시간 10:00~18:00(*월요일 휴관)
자연과 미술의 황홀한 어울림, 안상철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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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산저수지 |
미술관을 찾아 나선 김에 고개 넘어 기산저수지까지 가보기로 한다. 기산저수지를 마당 앞에 두고 있는 안상철미술관은 실험적인 창작으로 한국화의 파격을 이끌며 근현대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연정 안상철 작가를 기려 그의 아들인 건축가 안우성이 만든 것이다. 안상철 작가가 말년에 분재와 나무를 가꾸고 작업하면서 작가들과 교류를 했던 아뜰리에 근처를 사후에 미술관으로 꾸몄다. 커다란 노송 한 그루가 지키는 미술관 입구는 작고 소박하지만 그 뒤 미술관의 전경과 주변의 풍광은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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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상철미술관 |
정문인 듯한 1층의 출입구로 들어가 계단을 내려가면 작품 전시장이 나오고 그곳을 통해 밖으로 나서면 마당 하나를 놓고 기산저수지와 마주한 미술관의 본 모습을 보게 된다. 입구로부터 치자면 건물의 뒷면인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면인, 아름다운 미술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건축’을 개념으로 설계된 미술관은 지난 2008년 경기도 건축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미술관 안에는 안상철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 전시회도 수시로 열린다.
장흥의 예술가들이 만들어가는 ‘아트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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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묵화가 백성연과 마임이스트 이정훈의 공연 |
수묵화가 백성연, 서양화가 김수용 등 예술가들에 더해 기획자와 공연연출가가 힘을 보태고, 마을 구석구석까지 아트파크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장흥 면장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장흥아트콘서트’가 시작됐다. 이미 진행된 다섯 차례의 아트콘서트는 주민들과 여행객들의 뜨거운 반응 속에 성료 됐고, 지난 10월28일 우이령길에서 펼쳐진 여섯 번째 아트콘서트에는 1,000명이 넘는 참가자가 몰려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단풍과 함께 멋진 숲속 음악회를 즐겼다.
‘장흥아트콘서트’는 오는 12월말까지 전체 아홉 차례가 진행되는데, 나머지 세 차례는 장흥면에 소재한 복합문화공간 세 곳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장소와 함께 콘서트의 테마도 달라진다. 음악회의 콘셉트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의 내용도 달라진다. 흥미로운 아트 여행지다.
Info 안상철미술관
위치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권율로 905
운영 시간 11:00~17:00(*월요일 휴관)
[글과 사진 이상호(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04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