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레디움, 100년의 시간과 만난 전시
대전 초기 도시 형성의 중심지였던 인동. 1922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조선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경제 수탈 기관을 세웠던 이곳에선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구석구석에서 옛 시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 폐허의 공간에서 복합예술공간으로 변한 ‘헤레디움’ 역시 마찬가지다. 가을의 문턱에 접어드는 시점. 20세기 후반의 신표현주의 미술 운동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 작가 안젤름 키퍼의 작품과 헤레디움이 만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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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젤름 키퍼 ‘Herbst, Für R. M. Rilke, 2022’ ⓒAnselm Kiefer, Photo George Ponce(사진 HEREDIUM제공) |
안젤름 키퍼는 여러 시인의 작품을 모티프로 하여 자신의 작품에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이미지로 사고하고, 그 작업을 시가 돕는다’고 말할 정도로 시를 사랑하는 예술가이다. 그의 최신작은 오스트리아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 M. Rilke, 1875~1926)’의 시를 모티프로 한다. 키퍼는 삶이 변화하는 모습을 노래하는 릴케의 시에서 고독한 이면에 존재하는 희망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포착해냈다. 삶의 아픔 앞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작가의 철학은, 아픈 역사가 담긴 구 동양 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이 시민을 위한 복합문화예술공간 헤레디움으로 재탄생된 맥락과 맞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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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레디움 외관(사진 HEREDIUM) |
1922년 일본 건축가 오쿠라구미 설계 당시의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와 붉은 벽돌 그리고 경사지붕으로 구성된 2층 규모의 절충주의 서양식 건축양식이 특징이었다. 건물이 지어진 지 100년이 흐른 뒤, 재단법인 CNCITY마음에너지재단이 2년여에 걸쳐 다양한 고증자료와 분석을 통한 복원작업·리모델링으로 현재는 옛 모습을 간직한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으로 재탄생시켰다. 지난 9월8일 공식 개관한 이곳은, 근대 건축물의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고, 동시대 문화예술을 담아 미래 가치를 후대에 전한다는 취지를 지니고 있다. 추후 이곳에선 현대미술 전시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 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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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레디움 정문의 파사드(사진 이승연) |
이번 전시는 수탈의 장소를 소통의 공간으로 재탄생시켜 새로운 100년을 열고자 하는 헤레디움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폐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는 안젤름 키퍼의 철학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이번 전시에서 주목해볼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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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레디움 내부 ‘가을Herbst’ 전시(사진 이승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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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photo Atelier Anselm Kiefer(사진 HEREDIUM제공) |
‘가을Herbst’전은 그러한 키퍼의 작품 속 특징들을 단편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실제로 키퍼는 “작가가 되지 않았으면 시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많은 시를 외우고 문학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인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선 자필로 새긴 시 구절이나 인용문, 이름 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엔 세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만들어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이번 전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중에서 ‘가을날Herbsttag’(1902), ‘가을Herbst’(1906), 그리고 ‘가을의 마지막Ende des Herbstes’(1920)이라는 세 편의 시를 중심으로 선보인다. 전시장 내 18개의 작품 속 가을은 황량하면서도 서정적인, 그리고 ‘부패에서 다시금 재탄생’이라는 순환적 의미 등을 담고 있다.
안젤름 키퍼가 표현한 가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0여 년 전, 키퍼가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방문했을 때가 가을이었는데, 당시 나뭇잎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고 황홀해 작가가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고, 이후 작업을 진행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대표작 ‘가을(Herbst, Für R. M. Rilke), 2022’은 낙엽이 비추는 빛과, 그 빛이 만들어내는 색감에 영감을 받았다. 금박으로 표현한 낙엽의 빛은 쇠퇴가 아닌 재탄생을 떠올리게 한다. 릴케의 시와, 작품이 만나는 지점에서, 작가는 삶의 순환에 대해 거듭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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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젤름 키퍼 ‘Wer jetzt kein Haus hat, baut sich keines mehr, 2022’ ⓒAnselm Kiefer, Photo George Poncet(사진 HEREDIUM 제공) |
1945년생인 안젤름 키퍼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났다. 작가에게 있어 폐허는 유년시절 놀이 공간과 같았다. 혼란스러웠던 시대 속에서 성장해온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역사, 논쟁거리, 윤리적 문제, 민족적인 정체성 등을 표현한다. 대전 헤레디움과 독일 거장의 만남. 폐허가 될 뻔하다가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로운 시작을 연 이곳에서, 삶의 순환과 재탄생을 이야기하는 키퍼의 작품이 올가을 깊은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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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젤름 키퍼 ‘가을 Herbst’ 포스터(사진 HEREDI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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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 74-1
시간 수~일요일 11:00~19:00(입장 마감 18:30) *매주 월, 화요일 휴관
[글 시티라이프부 이승연 기자(lee.seungyeon@mk.co.kr)]
[사진 헤레디움, 이승연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01호(23.10.24)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