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오로지 종이 그리고 가위로 1만5,000권의 표지를 디자인한, 일본의 북 디자이너 장인 ‘기쿠치 노부요시’의 일과 삶을 그린 다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제작사 ‘분복’이 한국 관객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으로, 종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물 같은 영화다. ※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사진 (주)디오시네마)
일본 출판계의 존경받는 북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 디자인 작업이 디지털 기기를 통해 이뤄지고 일러스트, 인디자인 등이 상용화된 이후에도 그는 오로지 종이와 가위만으로 책 표지를 디자인해 왔다. 그의 작업 스타일을 보면 맨손으로 종이의 질감을 확인하고, 수많은 폰트를 하나씩 비교하면서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미지화시킨다. 주로 명조체에 독특한 변화를 주어 독자가 아주 특별한 배치와 여백, 고요하고 풍부한 색과 그림에 빠져들게 한다. 직접 종이를 자르고, 붙이고, 구겼다 펴는 등 수작업을 통해 평생 1만5,000권에 달하는 책 표지를 제작해 온 그의 작업 방식과 책을 대하는 태도는 가히 예술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어느 가족>,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만든 제작사의 첫 영화로, 마치 책 읽는 것처럼 제1장, 제2장의 형식을 통해 책의 텍스처나 온기를 그대로 따라간다. 아버지가 책 디자이너였던 히로세 나나코 감독의 시선을 따라 기쿠치 노부요시의 장인 정신을 들여다본다.
“제 방식대로 책을 읽을 필요는 없지만 그 입구는 될 수 있겠죠.” 평생토록 한 길을 묵묵히 걷는 ‘장인’의 가치를 매우 귀하게 여기는 일본 사회에서 책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 책을 읽는 독자의 실용성 등을 모두 따져가며 고민을 거듭해 표지를 디자인하고 있는 그의 작업 광경을 보며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남다른 감동을 받는다.
↑ (사진 (주)디오시네마)
힘들어하거나 고민하거나 의욕을 잃은 모습 대신 항상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책을 만지고 있는 그는 영화 속에서 시집과 소설의 질감이 다른 이유, 책 제목이 가진 은근한 무례함을 공백으로 표현하는 법 등을 설파한다. “장르를 불문하고 종이책은 소설의 ‘몸’이다. 소설이라는 산물의 몸이 종이책이다.”(기쿠치 노부요시) 사랑하는 연인의 피부 같다며 얼굴에 종이를 문질러보기도 하고, “띠지 문장이 별로”라며 출판사에 전화를 하는 북 디자이너. 극 후반 기쿠치 노부요시가 “불황의 시대에 좋은 책을 만나 독자들의 손을 기다리며 선반에 놓여있는 걸 보니 너무 행복해서 쑥스럽다”고 말하는 모습이 나온다. 솔직히 그가 의도한 것을 독자들이 과연 제대로 이해할까 싶다가도 ‘타인이 있어야만 디자인이다’, ‘타인이 없으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등 영화 속 그의 발언을 보면 장인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책의 모양을 전달하고 내실을 드러내 그 본질을 비주얼로 만드는 북 디자인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영화는 기쿠치 노부요시의 인간적인 모습을 비롯해 밝고 경쾌한 음악,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고양이의 모습 등을 넣어 다큐 특유의 딱딱함을 탈피했다. 뿐만 아니라 편집자나 제자의 증언을 통한 비평도 매우 흥미롭다. 책이라는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기쿠치 노부요시라는 장인이 어떤 상상할 수 없는 노력을 기울이는지 등을 눈으로 확인하며, 요즘 시대의 책이란 무엇인가, 아니 무언가에 혼을 담는 예술가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를 떠올려볼 수 있는 영화다. 러닝타임 93분.
↑ (사진 (주)디오시네마)
[글 최재민 사진 (주)디오시네마]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98호(23.9.26)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