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 자연에서 가진 사유와 성찰
연곷 만개한 세미원, 호젓한 구둔역
숲과 쉼을 콘셉트로 한 쉬자파크
예술이 깃든 히든 스페이스 산새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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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묵화 같으 ㄴ양평 두물머리 풍경 |
내리는 비마저 싱그럽게 느껴질 만한 여행지가 어디 없을까? 황금 같은 여름휴가를 그냥 방구석에서 날려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난다. 생각해보니 꽤 그럴싸한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후두둑 굵은 비가 쏟아지더라도 그게 운치가 되는 풍경, 바로 초록빛 짙은 연꽃 정원이다. 양평 연꽃 정원의 빼어난 풍광이 절로 떠올랐다. 연꽃이 만개한 세미원부터 호젓한 구둔역까지,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양평의 힐링 로드 산책을 소개한다.
물과 꽃의 정원, 세미원과 두물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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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두물머리 (아래)세미원 |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머리 위로 낮고 느리게 흘러간다. 양수대교 위에서 보이는 두물머리가 물안개에 둘러싸여 아우라를 풍긴다. 그 너머로 펼쳐진 세미원 일대. 바로 양서면이다. 물 맑고 산 깊은 양평의 모든 자연은 변함없이 싱그럽고 차분하다. 북한강을 건너자 곧 세미원이다. 평소 같으면 연꽃의 절정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세미원이 의외로 한적하다. 장마철 평일의 덕을 톡톡히 본다.
세미원이란 이름은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성현의 말에서 따왔다. 수몰지역의 땅에 연못 6개를 조성하여 연꽃과 수련, 창포 등을 심고 연못을 거치며 오염 물질이 제거된 한강물이 팔당댐으로 흘러가도록 만들어 자연정화공원의 기능을 하는 곳이지만 현재 경기도 지방정원 1호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낮에는 활짝 꽃잎을 열고, 밤에는 꽃봉오리를 오므려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연꽃은 여행객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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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원 |
이곳에는 홍련과 백련은 물론 수련과 노랑어리연, 빅토리아 수련 등이 있고, 희귀종인 가시연꽃과 세계적인 연꽃 연구가인 페리 슬로컴이 개발해서 기증한 페리 연꽃도 있다. 또 세미원 입구에 새롭게 만들어진 연꽃 정원에서는 태국의 수련 육종가인 노프차이 박사가 세미원의 지방정원 1호 지정을 기념하는 의미로 기부한, 물의 요정으로 불리는 내한(耐寒)성 수련 ‘세미1호’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전체 면적 20만7,587㎡(약 6만2,000여 평) 규모의 세미원은 연꽃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백련지, 모네의 정원, 세한정, 여러 척의 배를 이어 만든 배다리 열수주교 등 볼거리가 가득하며 8월15일까지 연꽃문화제도 열린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백련지의 연꽃과 한창 만개해 절정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는 홍련지의 연꽃을 보면 절로 겸허하고 숙연해진다.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청결하고 고귀한 자태를 드러내는 연꽃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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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빅토리아 수련, 물의 요정으로 불리는 세미1호, 추사의 세한도를 정원으로 꾸민 세한정 |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를 정원으로 꾸민 세한정. 오른쪽 건너편으로 북한강 지류와 본류를 나누는 섬이 보인다. 그 유명한 두물머리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물머리를 맞대는 두물머리는 ‘양수리’의 우리말이다. 흐린 날씨와 물안개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는 두물머리의 풍경 또한 멋진 수묵화를 보는 것처럼 인상적이다. 두물머리는 요즘 연잎으로 만든 ‘연핫도그’를 먹으러 가는 곳이 됐다. 풍경이 아니라 맛으로 시그니처가 되어가고 있는 것. 400년 된 느티나무와 물안개의 멋과 낭만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진다.
마음을 쉬게 하는 양평의 힐링로드
황순원 작가의 대표작인 『소나기』에는 ‘소녀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내용이 나온다. 양평에 황순원 문학관이 만들어진 이유다. 작가를 기리는 문학관은 보통 그의 고향에 만들어지기 마련인데 평안남도 대동군이 고향인 황순원 작가의 문학관은 ‘소녀가 이사를 간’ 양평에 터를 잡았다.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는 소설 『소나기』 속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냇가와 징검다리, 수숫단 등이 실감나게 꾸며져 있다. 또 소년과 소녀가 따던 도라지꽃과 마타리꽃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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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순원 문학관 |
수숫단과 원두막이 있는 소나기 광장에서는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도해서 소설처럼 소나기도 맞을 수 있다. 국내에 있는 문학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작가의 묘역을 지나 길게 이어진 수숫단 오솔길과 고향의 숲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다.
‘쉬자’라는 콘셉트를 자연 속에 구현한 쉬자파크는 용문산에 자리한 수목원 겸 숲속 공원이다. 숲과 쉼을 콘셉트로 한 힐링공간으로 생각하면 된다. 쉬자파크란 이름 역시 ‘잘 놀고 잘 쉬라’는 뜻. 테마파크 전체가 수목원에 휴양림을 더한 것처럼, 청정 자연과 함께 편의 시설까지 잘 갖춰져 있다. 산림교육센터, 초가원, 야외공연장, 야생화정원, 쉼터, 트리마켓, 암벽 등반장 등의 시설과 산림치유와 교육, 숲 해설, 유아 숲체험 등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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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 쉬자파크 |
반나절 정도의 짧은 나들이를 즐길 사람은 관찰데크와 생태습지를 둘러본 후 명상의 숲이나 쉬자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등산 혹은 숲길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은 약 2.3km의 숲길 탐방코스를 걸어보자. 경사도가 있어 약간 힘이 들 법하지만 1시간 정도로 상쾌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유아 대상 유아숲체험은 자연관찰탐구, 오감 숲체험, 자연놀이 등으로 진행되며, 초등생 대상 ‘숲에서 기르는 오감오덕’과 ‘나도 클라이머’ 프로그램도 있다. 2~10인 단위를 대상으로 교육 대상에 맞춘 20여 개의 숲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양평의 동쪽 지평면, 아련한 추억으로 남은 기차역이 하나 있다. 이젠 폐역이 된 구둔역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스무 살의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이 철길을 걷던 곳이다. 1940년 시작해 2012년에 문을 닫은 구둔역은 깔끔하게 새 단장했다. 아름드리나무와 녹슨 기차, 눈길이 가는 지점까지 나란히 놓여 있는 기찻길도 정겹다. 폐역의 아쉬움은 있지만, 마음껏 사진을 찍고 또 다른 추억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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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학개론>에 나왔던 구둔역 |
사유와 성찰의 길, ‘성경의 벽’과 ‘지저스 크라이스트’
양평군 서종면 안데르센공원묘원에 들어선 ‘성경의 벽’은 길이 83m, 높이 7.7m의 장엄한 건축물이다. 거대한 벽에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에 이르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네모 반듯한 스테인리스 패널 6,770장에 각인된 글자만 148만9,210자.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훈민정음체로 음각한 성경 구절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상념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이 작품의 본래 이름은 ‘펼침: 성경(UNFOLD: The Bible)’.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따온 별칭 ‘성경의 벽’으로 불린다. 작품을 만든 이는 전병삼 작가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을 활용한 대형 미술작품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미술가로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예술감독을 지냈고, 김포공항 국제선청사 중앙 로비에 설치된 ‘O(오)’, 일명 ‘달항아리’ 작품을 만든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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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벽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전부가 새겨져 있다. |
성경의 벽이 설치된 안데르센공원묘원은 소아암, 백혈병 등으로 세상을 떠난 어린이를 위한 자연 장지다. 세계 소아암의 날을 기려 2019년 2월15일 개장했으며, 소아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린이를 수목장으로 추모할 수 있도록 장지를 제공한다. ‘정인이’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면으로 마주한 성경의 벽이 마치 윤슬처럼 반짝인다. 벽 앞에 서면 종교를 떠나 누구든 신의 은총, 구원과 희망의 정경이 펼쳐진다.
여주와 접한 양동면 끝자락에 양평 숲속의 미술관이 자리한다. ‘C아트뮤지엄’이라 불리는 이곳은 조각가 정관모가 설립한 미술관이다. 16만5,000여㎡(약 5만 평)의 부지에 실내 미술관과 여러 개 테마 조각공원이 있다. 산책로로 이어진 야외공원은 동물조각과 사실조각, 시가 있는 동산 등 다양한 테마로 꾸며져 있다. 정관모 작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그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미술공원의 핫 스폿인 ‘지저스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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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속 미술관 ‘C아트뮤지엄’과 22.5m 높이의 ‘지저스 크라이스트’ 조각 |
그곳에는 코르텐 스틸로 제작한 높이 22.5m의 ‘지저스 크라이스트’가 있다.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의 얼굴이 강렬한 붉은빛으로 표현되어 있다. 예수 얼굴상 작품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조각예술의 거대함과 묵직한 질량감이 예술적 경지를 느끼게 한다. 작품을 받치고 있는 좌대는 카타콤을 상징하는데 안쪽으로 기도처가 여러 개 만들어져 있다.
예술이 깃든 히든 스페이스 산새공방
용문산 자락 연수리에 산새공방이 있다. 혹 산새갤러리, 카페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복합문화공간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주인은 손글씨 작가 손영희다. 요즘은 캘리그라피라는 말로 통용되지만, 그 말이 쓰이기 훨씬 전부터 손글씨를 썼고, 자신의 이름을 단 한글 폰트 ‘단아체’와 ‘02체’를 개발했던 손글씨 명인이다. 2002년 월드컵 ‘오! 필승 코리아’ 글씨를 썼던 바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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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합문화공간인 산새공방 |
산새공방은 손영희 작가의 집이자 작업실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작품들이 탄생하는 공간이며, 그와 소통하는 문화예술인들과의 만남의 장이다. 한 달 전에는 그곳에서 여러 뮤지션들이 참여하는 ‘하우스 콘서트’가 개최됐다. 손 글씨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찾는다. 먼 길 찾아와 커피며 디저트 같은 것을 맛보았던 여행자들에게는 여전히 정겹고 편안한 휴식 공간으로 기억된다. 손 작가는 한동안 작품 만드는 일에 몰두하느라 온종일 문을 열어놓지 못했지만 공간을 애정하는 이들의 성화에 다시 문을 열어야 할까 고심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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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새공방과 예배당 |
산새공방 뒤, 예쁜 모양의 작은 예배당이 있다. 여행지 포토존이 아니라 정식 예배를 올리는 예배당이다. 한두 명 정도가 들어가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으로 손영희 작가가 설계하고 직접 지었다. 예배를 드리기 좋게 내부 공간도 제대로 꾸며놓았다. 티 나지 않게 헌금함도 만들어 놓았는데 이곳에서 예배를 드린 이들의 믿음으로 쌓인 헌금으로 나눔을 실천하기도 한다. 산새공방 안팎에 깃든 작가의 손길이 따스하다.
[글과 사진 이상호(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9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