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빠이, 라오스 시판돈, 미얀마 시포, 베트남 사파
동남아시아 오지마을을 가다
여행은 이동의 연속이다. 집을 떠나 목적지로 가는 여정에는 비행기나 기차, 버스, 택시, 선박, 오토바이 등 상황에 따라 여러 교통수단을 거쳐가야 한다. 이동거리가 길수록, 교통수단이 다양할수록 도시는 점점 멀어지고 오지마을은 점점 가까워진다. 이동의 불편함을 말끔히 보상받을 만큼 특별한 동남아시아 오지마을로의 여행. 태국 빠이와, 라오스 시판돈, 미얀마 시포, 베트남 사파에서 이동의 자유를 만끽하고 여행의 이유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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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 빠이 협곡에서의 일몰 |
태국 빠이
자연과 예술, 모험이 가득한 산악마을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며 이동할 땐 순간 이동이 가능한 초능력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속까지 울렁거리는 불편한 상황에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라곤 창 밖 먼 곳을 응시하는 것이 전부다. 한 가지 더,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이동의 불편함을 말끔히 보상받을 거란 기대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것. 이 둘에 의지한 채 태국 치앙마이(Chiang Mai)에서 북서쪽으로 약 140km 떨어진 산악마을 빠이(Pai)에 안착했다.
미얀마 국경과 인접한 태국 북부 매홍손 주에 있는 작은 마을, 과거 미얀마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 마을은 미얀마의 대표 소수민족인 ‘샨족’이 거주하는 평범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역사적으로 5000년 이상 태국과 미얀마 소수민족이 중심이 되어 살아온 이 마을은 현대에 들어서 태국 북부 코끼리 사육의 거점이자 치앙마이와 매홍손을 잇는 경유지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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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지진의 여파로 땅이 갈라진 랜드 스플리트 2 산악마을 빠이의 자연 풍경 |
산악 계곡에 자리잡은 거주인구 약 1만 명에 불과한 빠이가 관광지로 탈바꿈하며 관광객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부터다. 빠이 일대에서 촬영된 태국과 중국 영화가 큰 인기를 끌면서 태국인조차 생소하게 여겼던 이 시골마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
여행객들 사이에서 반짝 유행에 그치고 마는 여느 관광지와 달리 빠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시골 마을 특유의 색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며 매홍손 최고의 휴양지로서 여전히 방문객을 끌어 모은다. 시골 특유의 소박한 자연경관에 더해 전 세계 히피들이 찾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예술 중심지로 각광받는 빠이는 자연과 예술, 모험 등이 한데 향유 가능한 여행지로서 산악 마을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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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악마을 빠이의 자연 풍경 |
낮에는 한산하고 평화로운 전형적인 시골마을 모습을 띠지만 날이 저물고 나면 카페는 라이브 콘서트 현장으로, 시장은 화려한 조명과 네온사인의 파티장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한낮의 빠이도 놓칠 수 없다. 스쿠터나 자전거를 타고 빠이 주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둘러보는 것이 대낮에 해야 할 일.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도 도로가 한산해 스쿠터를 타기에 안전하다.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1095번 도로를 따라 몇 번의 언덕을 넘으면 빠이의 역사적 명소를 하나둘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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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산악마을 빠이의 자연 풍경, 프라 수판 칼야 불교사찰, 카페에서 라이브 음악이 울려 퍼지는 빠이의 밤 |
언덕 위에 자리한 카페에서부터 사찰, 아트갤러리, 불상, 노천온천, 폭포, 협곡 등을 차례로 방문하다 보면 한나절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 특히 빠이 캐년(Pai Canyon)이라 불리는 협곡에서의 하이킹과 일몰 감상은 빠이 모험의 필수 코스이다. 수천 년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먼지투성이 붉은 능선 위에서 주변 계곡이 주황색으로 물드는 해질녘 풍경을 눈에 담는 순간, 구불구불 산길을 넘고 넘어 산악마을에 오길 잘했구나 싶은 만족감이 몸과 마음까지도 붉게 물들인다.
라오스 시판돈
매콩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내륙국 라오스에도 섬과 해변이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러 가는 과정은 험난했다. 라오스 남부 참파삭 주 메콩강에 자리한 시판돈(Si Phan Don)까지 가는 여정은 비행기에서 버스로, 트럭으로, 나무 배 네 개의 교통수단과 1박2일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만큼 이 오지마을이 진귀한 곳이라는 의미도 강력히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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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콩강의 아름다운 일몰 |
시판돈은 라오스어로 ‘4,000개의 섬’을 의미한다. 메콩 강변 군도에 다양한 모양의 크고 작은 섬이 시판돈을 이룬다. 4,000개의 섬 대부분은 무인도에 가까우며, 가장 면적이 큰 돈 콩(Don Khong)에선 메콩강을 벗삼아 어부로 살아가는 현지인들의 삶의 터전이 자리한다.
여행자의 주요 목적지는 돈 콩에서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돈 뎃(Don Det)과 돈 콘(Don Khon). 두 개의 섬이 마주한 형태로 돈 뎃에 비해 돈 콘이 2배 정도 크다. 섬 사이 프랑스 다리를 통해 도보로 왕래가 가능하다. 두 섬 모두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과 식당, 술집, 상점 등이 자리하지만 제법 큰 규모의 술집이나 식당은 대부분 돈 콘에 밀집되어 있다. 파티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돈 콘을, 조용히 휴식을 취하려는 사람들은 돈 뎃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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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메콩강 뷰 방갈로 숙소 (우)정글 숲 속 자전거길 |
시판돈이 관광지로 알려진 건 불과 10년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에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와 비슷한 시기. 대부분의 숙소에는 와이파이가 없을 정도로 현대문명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디지털 청정지역이다. 이러한 이유로 시판돈을 찾는 여행자들이 적지 않다. 현대문명에서 벗어나 자연인이 된 것처럼 오롯이 섬에서의 활동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판돈에선 사원이나 문화적 중요한 장소나 볼거리가 많지 않지만 방갈로 앞 해먹에 누워 메콩강을 따라 흐르는 강변 풍경과 고요한 주변 환경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휴식’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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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정령의 덫, 쏨파밋 폭포 (우)쏨파밋 폭포 인근 해변 |
자전거를 타고 두 섬 곳곳을 탐험하는 것 또한 최고의 호사다. 자전거 투어에서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은 쏨파밋 폭포(Somphamit Waterfall). 이곳 사람들은 폭포수가 덫이 되어 악령을 잡는다고 믿기 때문에 일명 ‘정령의 덫’이라는 이름의 리피(Li Phi) 폭포라고 불린다. 바위 절벽 사이의 거대한 급류로 유명한 이곳은 스릴 넘치는 볼거리와 함께 폭포 인근 해변에서 수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해변과 폭포를 따라 조성된 전망대에선 일출과 일몰 감상이 가능하다. 나무배를 타고 섬을 둘러보는 아일랜드 호핑도 4,000개의 섬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시판돈에선 어떠한 계획을 세우거나 무언가를 하려는 움직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메콩강을 배경 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는 것이 여행의 핵심이다.
미얀마 시포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언덕마을 하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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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포 언덕마을 전경 |
미얀마와 태국은 이웃한 나라라는 이유로, 두 나라의 여행 인프라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여행자들을 종종 보게 된다. 숙소나 식당, 상점 등의 여행 물가를 비교했을 때 태국에 비해 미얀마 여행의 질이나 만족도가 현저히 낮아 불평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두 나라가 이웃이긴 해도 비교대상으로 삼는 건 자칫 어폐가 있을 수 있다. 해외 여행객을 위한 기반시설이 형성되기 시작한 건 태국이 미얀마보다 수십 년 앞서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미얀마. 외국인들에게 관광 문호를 개방한 건 1990년대 초부터지만 21세기 현재까지 전혀 변하지 않은 사회, 정치, 경제 때문에 미얀마의 관광산업은 실질적으로 후퇴에 가깝다. 이러한 미얀마의 특색은 오히려 친숙한 여행보다 낯선 나라,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다. 잘 갖춰진 여행 인프라 대신 새로운 장소, 특별한 탐험에 목마른 여행자들이 미얀마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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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포 언덕 위에 조성된 길 |
그렇기에 양곤(Yangon)이나 만달레이(Mandalay)와 같은 대도시를 벗어나면 오지 마을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시골 정취 물씬 풍기는 마을과 관광객의 때가 타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여러 오지 마을 중에서 시포(Hsipaw)로 향한다.
시포는 미얀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만달레이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 떨어져 있다. 샨(Shan) 주의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마을은 상쾌하고 온화한 기후 탓에 열대 더위를 피하기 위한 장소로 인기가 높다. 만달레이에서 버스를 타고 이곳에 닿으면 첫인상은 우리나라 옛 시골 읍내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1990년대 중반, 매년 여름방학이면 머물렀던 할머니의 시골집 그 마을과 시포의 풍경이 꼭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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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네 시골 할머니 댁에 온 것 같은 시포 중심가 풍경 |
시포를 즐기는 방법은 언덕 위에 자리한 마을을 둘러보는 하이킹 투어다. 마을 주변의 구불구불한 언덕에는 이곳 주민들이 일일이 닦아놓은, 제법 잘 정리된 트레킹 루트가 조성되어 있어 하이킹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마을 중심가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 문의하면 원데이, 1박2일, 2박3일 등의 하이킹 투어 일정이나 상품 안내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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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포마을 하이킹 투어 |
이 하이킹 코스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계곡과 마을의 주된 수입원인 찻잎나무산지를 통과한다. 1박이나 2박 하이킹 투어의 경우 현지인 집에 머무르는 홈스테이로 구성되는데, 현지인이 직접 요리하는 샨 주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것이 투어의 하이라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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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스테이 현지인 주인이 요리하는 샨주 전통요리가 포함된 로컬 밥상. 밥과 국, 반찬으로 구성돼 있다. |
현지음식은 우리나라 일반 가정식과 비슷한 차림새다. 밥과 국, 여러 개의 반찬으로 구성된 식사를 하며, 직접 기른 각종 채소로 요리한 반찬은 신선함과 건강함이 최고의 맛을 제공한다. 홈스테이 주인이 정성스레 차린 밥상은 여러 번 언덕을 오르내리느라 지친 하이킹의 피곤함을 단번에 씻어준다. 그렇게 깨끗해진 몸과 마음엔 어린 시절의 향수가 물밀 듯 몰려온다. 시포에서의 시간은 과거를 향한다. 그리고 맛과 향으로 기억된다.
베트남 사파
계단식 논과 삶을 일구는 고산족의 땅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북서쪽으로 약 400km 떨어져 있는 사파(Sapa)는 중국 국경과 인접한 위치에 자리한다. 해발 1,650m에 터를 잡은 이 마을은 아름답고 험준한 풍경과 문화적 다양성이 한데 뒤섞여 있다. 베트남의 다른 지역과 달리 여름이 비교적 온화하다는 이유로 1922년 당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사파는 피서지로 인식되어 오늘날 북서부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이 되었다. 우뚝 솟은 산과 계곡, 산봉우리를 가로지르는 짙은 안개, 고산마을의 정취와 고산족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사파의 매력은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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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파에서 만난 고산족들과 사파 마을 전경 |
하노이에서 야간 기차나 장거리 버스를 타고 사파 중심지까지 한번에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도 매력이다. 하지만 이는 오지마을을 여행하는 데 있어서 동전의 양면. 이를 테면 산악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지어진 케이블카나 대형 호텔 등은 사파의 고유성을 저해한다.
그럼에도 사파 중심지를 벗어나면 주변마을에선 여전히 날것 그대로의 매력을 간직한 채 관광객을 맞는다. 이곳이 관광자원으로 찬양받기 이전부터, 베트남 북부 라오까이(Lao Cai) 주의 핵심마을 역할을 해온 사파는 여전히 소수민족의 땅이자 그들의 삶의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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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파의 계단식 논. 이들의 주요 수입원은 쌀이다. |
몽족, 다오, 자이, 포루, 떠이 등 여러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사파의 주요 수입원은 쌀농사다. 베트남은 전 세계에서 1인당 쌀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다. 대부분의 땅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마을에선 계단식 논을 경작해 농사를 짓는다. 계단식 논을 직접 보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 일은 사파에서 꼭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마을 특성에 따라서 로컬가이드가 필요하거나 혹은 가이드 없이 방문이 가능하며, 캣 캣(Cat Cat)과 타 핀(Ta Phin)과 같은 마을은 가이드 없이 여행자 홀로 계단식 논을 거닐고 언덕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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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파 고산족과 여행객 |
소수민족 시장 방문도 놓치지 말 것. 각 부족마다 전통의상을 차려 입고 물건을 파는 활기 넘치는 시장 풍경은 오직 사파에서만 볼 수 있다. 흥정 역시 가능하다. 그리고 문명화된 부족을 보고 놀라지 말 것. 관광객을 상대하는 것이 그들의 주요 업무이다. 결국 그들의 문명화는 관광객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시작되지 않았을까? 그저 보고 웃고 즐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오지 마을 여행을 넘어 마을의 고유성을 오래도록 지켜갈 수 있도록 하는 여행자의 책임의식을 생각하며 사파에서의 여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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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파마을 전경 |
[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8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