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석유와 곡물, 광물 가격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은 실존한다. 흔히 천연자원 시장은 투명하며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실제 가격을 움직이는 건 소수의 독점적 중개업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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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비에르 블라스, 잭 파시 지음 / 김정혜 옮김 / 알키 펴냄 |
2011년 세계 최대 석유 중개업체 비톨의 최고경영자(CEO) 이안 테일러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리비아의 벵가지에 전용기를 타고 도착했다. 건장한 보디가드 둘과 중동 지사장만을 대동한 채였다. 반군은 ‘아랍의 봄’을 통해 독재자 카다피를 쫓아내고 임시정부를 세웠다. 리비아 국영 석유업체 기술자가 지도자가 된 반군은 차와 발전소를 움직일 원료유가 절실했다.
석유와 돈이 권력과 결탁하는 세상에서 지정학적으로 중대한 거래라면 불속으로도 뛰어드는 나방처럼 살아온 테일러는 반군과 거래 가능성이 생기자 곧장 기회를 낚아챘다. 카타르는 리비아 반군과 거래를 희망했지만 정제된 석유를 유조선에 싣고 전쟁 지역으로 운송하는 건 차원이 다른 어려움이었다. 테일러는 벵가지에 정제석유를 내려주고, 지중해 연안 토브룩까지 원유를 송유관으로 끌어와 현물을 대신 받기로 결정했다.
영국 보수당의 중요 재정 후원자인 테일러는 리비아에 다녀온 지 불과 몇 개월 뒤 다우닝가 총리관저에 나타나 총리 만찬에서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고 개입했다”고 발언했다. 이처럼 영국과 미국의 후방 지원을 받은 비톨의 개입으로 전쟁은 팽팽하던 균형이 무너졌다. 척박한 북아프리카에서 연료유 확보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비톨의 원료유가 도착한 직후 7월 리비아 반군은 주요 도시를 차례로 점령하고 8월말 수도를 함락했다. 40년 독재자 카다피는 고향으로 도망쳐 하수구에 숨었고 반군은 그를 때려 죽였다.
30년간 중동 지역을 잡고 있던 테일러는 카다피 정부군이 송유관을 파괴해 원유를 받지 못할 위기에도 판돈을 걸고 배팅했다. 5개월간 30회에 걸쳐 연료유 등이 인도됐고 비톨의 외상대금은 한때 10억 달러를 넘어 존립 위기까지 겪었다. 그럼에도 비톨의 개입으로 혁명은 끝났다. 비록 리비아는 이후 몇 년간 끝없는 무력 충돌의 수렁에 빠져들었지만.
스위스, 미국 뉴잉글랜드 한적한 도시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원자재 트레이더들은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현대 경제의 톱니바퀴를 굴린다. 이들은 세계 전략 자원 흐름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지배력에 힘입어 정치 무대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미국 제재를 피해 석유를 수출한 데는 이들의 은밀한 도움이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를 위해 설탕과 석유를 바꿔주어 혁명의 불꽃을 지켰고, 미국산 밀과 옥수수를 소련으로 수출해 제국의 마지막을 떠받쳤다.
저자들은 원자재 중개 업체를 세계화된 자본주의가 낳은 ‘위험 사냥꾼’이라 정의한다. 수급 불균형으로 돈을 버는 이들에겐 전쟁과 팬데믹, 테러도 기회가 된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숨겨진 퍼즐을 세상에 드러낸다. 원자재 중개 업체에게 현대 사회는 시장이 황제로 군림하고, 국제화된 기업이 규제 기관의 거의 모든 시도를 무력화하며, 국제 금융을 주무르는 거인이 정치인보다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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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런 그로프 지음 /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펴냄 |
『운명과 분노』(2015)로 세계적인 명성을 거머쥔 작가 로런 그로프의 신작 장편 소설이 나왔다. 이 소설은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십자군전쟁이 한창이던 중세의 혼란기 한복판으로, 그곳에 자리한 혁명적인 여성 공동체의 중심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가난한 잉글랜드 수녀원의 부원장으로 임명된 열일곱 살짜리 왕가의 사생아 마리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이 소외된 공동체를 부강한 불가침의 성역이자 오직 여성들만을
[글 김슬기 기자 사진 각 출판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84호(23.6.20)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