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스 씨(Place C)’ 개관전 ‘로즈 와일리: Hullo Again’
경주와 한옥에 반한 로즈 와일리, 대표작 흔쾌히 내줘
문화 허브 꿈꾸는 복합 문화공간 플레이스 C
어린 아이가 그린 듯한 자유 분방하고 사랑스러운 표현과 발랄한 색감. 경주에 생긴 복합문화공간 ‘플레이스 씨(Place C)’에서는 개관 기념으로 영국을 넘어 전 세계를 사로 잡은 88세 작가 로즈 와일리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역, 그것도 경북 경주에서 로즈 와일리 같은 메가 스케일의 전시가 열린다니. 건강 문제로 비행이 여의치 않아 미처 경주에 와보지는 못했다는 로즈 와일리는 경주가 주는 이미지와 함께 미술관 한옥 건물을 사진으로 접하고, 전시를 단번에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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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와일리: Hullo Again’이 열리고 있는 경주 플레이스C |
경단녀의 화려한 부활, 로즈 와일리
나이가 보이지 않는 작가...그녀의 자유분방한 그림
플레이스 C의 갤러리 문을 열면 자신의 캔버스를 배경으로, 안경을 쓴 채 회갈색 가디건을 입고 화면을 응시하는 시크한 표정의 로즈 와일리가 입장객을 맞는다. 장난스럽지만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앙다문 붉은 입술. 70대에 데뷔해 80대에 전성기를 맞은 할머니 화가 로즈 와일리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결혼 후 경단녀로 세 아이를 키우며 살다가 47세에 미술 학위를 받는다. 그러나 큰 명성을 얻지 못하다 76세에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영국에서 가장 핫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선정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다.
“70대의 로즈는 운송비조차 지원 받지 못해 자신을 발굴한 갤러리스트 야리 라거와 함께 무작정 작품을 차에 싣고 유럽 전역을 돌며 작품을 선보였다”고 밝힌 플레이스 씨의 콘텐츠 디렉터 김신희 시니트 대표는 “그렇게 예술세계를 개척해 간 결과 80대의 로즈는 세계 3대 갤러리 데이비드 즈위너 갤러리 전속 작가로 전 세계 유명 미술관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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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와일리 개관전 입구의 모습 |
이번 개관전에서는 로즈 와일리의 거대 ‘파인애플 ‘Pineapple’ 초대형 버전이 국내 최초로 공개되며, 그녀의 대표작 ‘Six Hullo Girls’, ‘Titian Tableau(Wolly Hat)’, ‘Red Twink and Ivy’를 포함, 대형 유화 작품 40점, 드로잉 작품 45점, 최초 공개 조형물 25점과 최신 연작 등 총 110점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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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작품 중 가장 큰 규모의 조형물인 거대 ‘파인애플 ‘Pineapple’ 초대형 버전이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
‘시작’, ‘살아있는 모든 것들’, ‘필름 노트’, ‘축구’, ‘소녀들’, ‘역사’, ‘뉴스와 광고’, 그리고 ‘가위 소녀들’ 8개 주제로 구성된 플레이스 C 개관전에서는 “고상한 척하는 건 딱 질색”이라는 작가의 세계관을 여실히 드러내는 조형물도 만나볼 수 있다. 드로잉 혹은 유화에서부터 발전되어 나오지만 회화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는 조형 작품 가운데는 자신과 가족에게 재정적,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힌 사기꾼의 두상 조형물 ‘장의 헤드(Jan’s head, 2020)’, 다리를 180도로 찢고 있는 ‘씨저 걸(Scissor Girl5, 2017)’도 포함돼 있다.
‘손흥민을 그린 할머니 화가’, ‘알려진 축덕’인 그녀의 작품이 걸린 ‘축구’ 섹션은 갤러리에서 가장 이색적인 부분. “‘축구의 신들’은 항상 신문을 장식했다. 우리는 모두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공유된 아이콘이자 좋은 소재였다. 나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들을 찾았고, 작품을 통해 시각화했다.”(로즈 와일리) 아스널과 토트넘 두 라이벌 팀의 경기를 공중에서 보는 시점의 ‘아스널과 토트넘(Arsenal and Spurs), 2006’을 보자. 팀의 심벌인 대포(아스널)와 수탉(토트넘)을 선수들보다 크게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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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senal and Spurs, 2006, Oil on canvas in two (2) parts 165x366cm Courtesy of Private collection |
구글을 적극 검색하고 인터뷰, 유명인과 스포츠, 만화책, 영화, 동식물에서 시각적 형상을 이끌어내는 로즈 와일리는 대중의 보편적인 기억과 문화, 경험을 독창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녀의 전시를 보면 그녀의 관심 주제가 무엇인지, 그녀가 얼마나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관람객 역시 잠시 잊고 있던, 자신이 좋아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고상한 건 질색이에요” 로즈 와일리
최초 공개 ‘파인애플’ 포함, 대표작 전시
“나는 커다란 페인트 통에 손을 넣어 물감을 잔뜩 묻힌 후 가장자리까지 칠했다. 가장자리는 중요하다. 잘못되어도 크기를 줄일 수는 없기 때문에... 더 크게 만들거나 덮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래서 캔버스를 스테이플로 연결하고 나중에 작품을 고정하는 방법으로 진행했다.”(로즈 와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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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d Painting Bird, Lemar & Elephant(2017) Oil on canvas in three(3) parts 183x499cm Courtesy of Private collection |
영국 유명 미술관 ‘터너 컨템포러리’의 클래리 월리스 관장이 “장난기 넘치는 동시에 아이러니한 삶의 작업 일지”라고 밝힌 로즈 와일리의 작품에는 작업 과정에서 생겨나는 모든 사건들이 기록돼 있다. 바닥에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리다가 포개놓고, 하나씩 붙여서 확장하기도 하며, 손으로 문질러 작품을 완성하기도 한다. 그녀의 이런 작업은 작업과정을 보존하는 일종의 타임캡슐로 창작의 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캔버스엔 고양이 발자국과 그녀 자신의 발자국이 찍혀 있으며 담배 재나 커피 얼룩도 그대로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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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ueen of Pansies(Dots), 2016, Oil on canvas in two(2) parts 183x331cm Courtesy of Private collection |
그림 위에 삐뚤빼뚤 복잡한 글씨를 얹고,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덧칠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캔버스나 종이를 오려 붙인다. 캔버스 전체를 뒤덮을 만큼 오브제를 크게 그리거나 한쪽에 작게 그려 넣기도 한다. 자막을 넣거나 캔버스를 카메라 프레임처럼 활용할 때도 있다. 자신만의 캔버스로 세상을 사진 찍는 달까. 신화와 역사, 유명 축구 선수와 영화 배우, 시리아 상공의 스텔스 전투기에 관한 뉴스는 그녀만의 독특한 프리즘을 통과해 독특한 작품으로 완성된다.
영화 <페이퍼 보이>로 칸 영화제를 찾은 니콜 키드먼의 끈 달린 드레스 사진을 인터넷에서 보고 착안한 ‘니콜 키드먼의 초상NK(Syracuse Line-Up), 2014’,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나쁜 녀석들>을 보고 그린 ‘Inglorious Basterds’(2010)에서 보듯 그녀는 영화 신문과 포털 뉴스, 팟캐스트와 인스타그램 이미지, 작가들의 인터뷰를 적극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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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glorious Basterds’(2010) |
처음 그림을 그리는 아이 같은 그녀의 작품은 얼핏 보면 단순하고 쉽게 그린 듯 보인다. 그러나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한 후 연속적인 실험을 통해 나온 작품은 본래와는 완전히 달라져 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때는 작품에 글을 넣음으로써 사실적인 요소를 넣기도 한다. “저는 제약을 두는 것을 싫어해요. 선택지와 가능성을 많이 열어 두죠.”(로즈 와일리) 특히 3년 전 열렸던 전시에서는 사진 촬영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저걸(ScissorGirl, 2017)’도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다는 것도 플레이스 C 개관전에서 주목할 부분. 갤러리엔 (그녀의 작품에는 ‘다리’가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유연하게 다리 찢기를 하고 있는 시저걸 시리즈가 별도 섹션으로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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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x Hullo Girls 2017 Oil on Canvas 182 x 330 cm Rose Wylie |
이번 ‘로즈 와일리(Rose Wylie): Hullo Again’ 전(展)은 야외 정원을 거닐며 반복해 여러 번 관람했다. 핑크와 옐로우, 두꺼운 선은 처음엔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두 번째 볼 때는 그림과 조형물에 담긴 작가의 뜻을 상상하게 만들며, 세 번째에는 오브제와 작가 사이 수없이 묻고 답했을 시간이 떠오른다. 로즈 와일리 전시를 본 뒤에는 한옥 지붕의 2층 카페로 이동해 ‘로즈 와일리 티 세트’를 꼭 맛보자. 라즈베리와 커스터드 크림, 사과가 들어간 디저트와 평소 로즈 와일리가 즐기는 홍차로 구성된 세트로, 그림에 나올 듯한 꽃잎 모양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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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그녀가 즐기는 홍차가 포함된 로즈 와일리 티 세트는 아티스트와 작품을 재해석한 음료와 디저트 세트로 전시 기간 동안만 판매하는 한정판 메뉴다. |
시저 걸 시리즈는 유명한 토크쇼인 ‘그레이엄 노튼 쇼’의 오프닝 시퀀스에 아주 짧게 등장하는 다리를 찢은 금발의 인형을 보고 이를 자신만의 형태로 비판적으로 재해석해 낸 것이다. “그녀가 묘사한 여성은 날씬하며 작은 손과 발, 큰 눈과 속눈썹, 과장된 헤어스타일로 표현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통해 유머러스하고 대담하며 야심 찬 여성들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전형적인 여성적 이미지를 해체시켰다.”(큐레이터 클래리 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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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issor Girl 2017 Oil on canvas in two(2) parts 183x330cm Courtesy of Private collection |
로즈 와일리
1934년 영국 켄트에서 태어나 포크스톤&도버 스쿨 오브 아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 진학했다. 이후 세 아이를 키우면서 미술 교사로 일하던 중 47세 되던 1981년 런던 왕립예술학교 석사과정에 도전해 다시 한번 미술을 공부했다. 1979년 데뷔했지만 30년 후인 75세부터 서서히 알려졌고, 2013년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개인전, 2014년 최고의 현대미술가에게 수여되는 존 무어스 회화 상을 받으며 당대 최고의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경주 복합문화공간 플레이스 C 개관
한옥 펜션 업사이클링…지역과 상생하는 문화 큐브
신경주역에서 차를 타고 논밭을 지나 한적한 동네를 한참 달리다 보면 로즈 와일리 전시가 열리고 있는 한옥 건물이 나타난다. 2,000평 부지에 연면적 총 600평 규모의 ‘플레이스 씨(Place C)’는 갤러리, 카페와 바, 한식당과 야외정원, VIP룸으로 구성된 복합문화공간이다. 지난 4월 문을 연 이곳에서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화풍과 발랄하고 유쾌한 색감, 소녀 같은 순수한 감성으로 전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로즈 와일리(Rose Wylie): Hullo Again’ 개관전(展)이 10월까지 열린다.
야외 정원의 거울 연못 위에는 로즈 와일리의 조형물 ‘Pineapple’뿐 아니라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유명 일본 작가 나카무라 모에의 조형물인 ‘Our whereabouts’와 ‘Inside me’도 서 있다. 건물은 기존 한옥을 철거하는 대신, 많은 비용이 드는 데도 불구하고 기존 목재를 그대로 살린 업사이클링 건축으로 지어졌다. 한국에서 육종학을 개척했던 우장춘 박사의 한옥 기념관 목재를 그대로 살려 리노베이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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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스C의 모습 |
2층 카페에 올라가면 경주 오릉과 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옥 두 동과 신축 한옥 한 동으로 이뤄진 D자 건물은 미술관과 카페, 야외 정원을 낮고 조붓하게 감싸 안은 풍경은 플레이스 씨를 만든 최상원 회장의 유년 시절 고향 풍경을 되살린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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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외 정원 |
마치 무대 장치 같은 흰 증기가 연못에서 나와 소나무와 흰색 큐브로 만들어진 중정, 한옥을 감싸 안으면 마치 산수화로 한걸음 걸어 들어간 느낌이 든다. 야외 정원 전체가 갤러리가 된 느낌이랄까. 갤러리와 마주한 1층 한식당에서는 지역 상생을 위해 제철 지역 특산물과 향토음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솥밥 정식을 판매 중이다. 국내산 문어와 전복을 넣은 ‘문어전복 솥밥’과 경북 지역 제사상에 자주 오르는 ‘돔배기(상어 고기) 솥밥’ 등이 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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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층 카페 야외 공간 |
하동의 차(茶)를 베이스로 한 다양한 음료가 서브되는 2층 한옥 지붕 카페에서는 야외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주 황리단길, 교촌마을, 안압지, 첨성대 등이 15분 이내 도보거리에 위치해 있으니 경주 여행 동선에 함께 올려봐도 좋겠다. 경주의 새로운 문화 허브를 꿈꾸는 플레이스 C 개관전 ‘로즈 와일리(Rose Wylie): Hullo Again’ 전(展)은 10월3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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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스C 전경 |
플레이스 C 최유진 대표는 “이번 전시가 그녀의 국내 전시로는 마지막일 수도 있으며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들도 있다”고 밝혔다. 무라카미 타카시, 나카무라 모에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니 자세한 전시 내용은 플레이스 씨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자.
Info 플레이스C 위치 경북 경주시 사정동
‘로즈 와일리(Rose Wylie): Hullo Again’ 전(展)
전시 장소: Place C 1층 전시관
전시 기간: 2023년 4월15일(토)~10월3일(화) 월요일 휴관. 공휴일 영업, 익일 휴관
관람 시간: 11:00~18:00(입장 17:00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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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찬은 기자(park.chaneun@mk.co.kr)
사진 박찬은, 플레이스 C]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8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