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킹의 경험치가 쌓이면 그만큼 이동에 편의가 생길 줄 알았다. 물론 지도를 보거나 장소를 찾거나 방향을 정하는 데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가면 갈수록 부유한 나라로의 이동이 예상치 못한 발목을 잡았다. 한나절 이동한 거리가 고작 20㎞에 불과해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고, 약 300㎞를 이동하는 데 3박4일이 꼬박 걸리기도 했다. 과연 최종 목적지인 벨기에 남부까지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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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을 뜻하는 ‘D’를 적은 보드판을 들고서 히치하이킹 중인 친구 스와미 |
자그레브에서 슬로베니아 국경까지는 불과 약 30㎞ 거리. 애당초 자그레브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고 계속해서 국경을 넘을 계획이었던 터라 새 땅, 새 날의 기운을 오롯이 받으며 친구 스와미(Swami)와 나는 E70 도로 위에서 엄지를 들었다.
국경마을 브레가나(Bregana)로 향하는 차량에 운 좋게 올라타 국경검문소까지 동행했다. 톨게이트처럼 생긴 국경검문소엔 슬로베니아로 향하는 차량행렬이 각 구간마다 줄지어 있고, 우리는 네 바퀴 대신 두 발로 검문소를 통과했다. 슬로베니아 국명과 국기를 알리는 표지판이 시야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또 한번의 특별한 경험과 목표 달성도 그 끝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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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블랴나 외곽 지역 골목길 풍경 |
사흘 뒤 이탈리아에 닿아야 하기에 당장 할 수 있는 건 빨리 이동하고 목적지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블레드 호수에서의 하룻밤은 꼭 사수하고 싶었다. 이곳 현지인들처럼 호수에 몸을 담그고 물맛을 제대로 즐기고 싶었기 때문에. 류블랴나 외곽 지역에 도착한 뒤 끼니를 챙기는 시간을 제외하곤 장소를 바꿔가며 엄지를 들고 또 들어 블레드 호수까지 하루 만에 주파했다. 결국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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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맑고 투명한 청록 빛의 블레드 호수 (아래)정상에서 바라다본 블레드 호수 전경 |
최대 길이 2,120m, 최대 너비 1380m, 최대 깊이 30.6m의 호수에서는 물놀이뿐 아니라 트레킹도 가능하다. 호수 주변 맑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6㎞의 평지를 걷거나 트레킹 코스로 조성된 가파른 숲길을 등산하듯 산책하기 좋다. 트레킹 코스는 호숫가 표지판에서 정상까지 약 1시간 정도, 정상에 올라 블레드 호수를 파노라마로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숨이 차오를 듯 헉헉대며 올라간 정상에서 요정이 신나게 뛰놀던 곳곳을 한눈에 조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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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에서의 히치하이킹 |
블레드 호수까지 비교적 단시간 내에 연이어 운전자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천운 덕분이었을까? 슬로베니아가 히치하이킹하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블레드 호수를 기점으로 힘을 얻지 못했다. 한나절 동안 이동한 거리가 고작 20㎞에 불과했기 때문. 고맙게도 그 이동을 도와준 현지인 운전자는 예세니체(Jesenice)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우리를 떨궈주고 떠나면서 “이곳 주유소에서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운전자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확신에 찬 말을 건넸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건만 몇 시간째 내려갈 줄 모르는 엄지는 잔뜩 부풀어 오른 모습이다. 게다가 안개비처럼 내리던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더니 세찬 비로 바뀔 것 같은 음산한 기운까지 더해졌다. 더는 이동이 불가능했다. 철수다. 휴게소에서 하룻밤 묵을 수밖에. 엄지를 접고 당장 텐트를 칠 만한 장소부터 찾아 나섰다. 커다란 광고판 뒤편 잔디가 엉성하게 깔린 구석공간을 어렵사리 찾아내 후다닥 텐트를 설치하곤 그 속에 몸을 숨겼다. 텐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내리치는 장대비가 한동안 길게 이어졌지만 다행히 텐트는 제 몫을 훌륭히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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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블레드 호수 이후 한나절 동안 우린 고작 20km 이동했다. (우)슬로베니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의 캠핑 |
캠핑은 히치하이킹 여행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하루동안의 이동거리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장소의 숙소를 미리 예약한다거나 어떤 장소에 닿은 뒤 숙소를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시간과 돈, 에너지를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히치하이킹은 도로 위에서 엄지를 들고 사람을 만나 이동하는 것 외에도 매일 밤 잠자리를 살피는, 즉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그 속성을 이해하는 여정이 함께한다. 그 의미를 깨닫는 여정, 몸은 고되도 마음은 고되지 않다.
산 칸디도 시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스와미의 친구들을 만났다. 이들과 함께 주말을 보내기로 계획했던 터라 금요일 저녁 토마스(Tomas)와 마르쿠스(Markus)의 퇴근시간에 맞추느라 슬로베니아에서부터 두 번의 국경을 빠르게 넘어왔다. 마르쿠스 집에서 주말 동안 머무르며 이들이 계획한 일정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회포를 풀기 위해 이동한 첫 장소는 산 칸디도에서 차로 대략 1시간30분 떨어진 산 피에트로(San Pietro)의 뮤직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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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반시계방향)이탈리아 산 칸디도 시내 중심가, 목가적인 알프스 마을에서 즐긴 산 피에트로 뮤직 페스티벌, 친구들(토마스, 마르쿠스)과의 즐거운 한때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돌로미테(Dolomites)의 중심부. 이곳에 자리한 고산 마을답게 산 칸디도의 하이라이트는 주변 산과 호수를 둘러보는 것이다. 그중 토마스와 마르쿠스의 강력 추천 장소는 소라피스 호수(Sorapis Lake) 트레킹. 돌로미테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하이킹 코스 중 하나다. 호수라고 표현하기엔 그 말이 너무 평범할 만큼 신비로운 장소와 색을 내뿜는 곳이라고 이들은 추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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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소라피스 산 풍경 |
아찔한 경험은 그만큼의 아찔한 풍경을 선사한다. 모험에 따른 공포와 성취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험준한 산맥의 황홀한 풍경은 흥분된 마음을 쉬이 잠재우지 못했다. 호수를 만나기도 전에 흥분 지수는 이미 최대치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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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카로운 석회암 봉우리로 둘러싸인 청록색 소라피스 호수 |
사실 호수의 첫인상이 소름 돋을 만큼 너무나도 강렬하고 특별해 만에 하나 수영이 가능하다고 해도 쉬이 몸을 담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몸을 담그자마자 곧장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운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강렬한 기운은 호수를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할 만큼 혼을 쏙 빼놓기에 이미 그 속에 몸을 담근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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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청록색 소라피스 호수, 눈 사이에 좁다랗게 조성된 하이킹 코스, 소라피스 호수에서 만난 염소 |
이제껏 최종목적지인 벨기에 남부를 향해 이동했던 것과 달리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 리엔츠를 거쳐 우텐도르프까지를 목적지로 정한 건 내 친구 줄리안(Julian)의 집이 그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내 친구의 친구 집’을 방문했다면 이번엔 ‘내 친구의 집’을 방문할 차례다. 리엔츠에서 산 칸디도까지 올 때 비교적 어렵지 않게 운전자를 만났던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엄지를 들었다. 히치하이커에게 월요병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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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줄리안 집 맨 꼭대기 층에 마련된 게스트 룸 (아래)줄리안(가운데)과 그의 어머니(오른쪽) |
여성 혼자 운전하는 차량에 탑승한 건 슬로베니아에서 한번, 오스트리아에서 세 번째다. 남성 운전자 세상이었던 남쪽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선진화된 나라일수록 여성의 평등성과 독립성이 보장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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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불고기와 부침개, 흰 쌀밥까지 한국요리차림 (아래)계단식으로 3단계에 걸쳐 아래로 떨어지는 크리믈 폭포 |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줄리안과 한국음식을 한번도 먹어본 적 없는 그의 어머니를 위해 불고기와 부침개에 가까운 나름의 한국요리를 만들어 대접하기도 하고, 오스트리아의 자연을 더 깊숙이 들여다 보기 위해 반려견까지 대동하고 젤암제 호수(Zell am See Lake)와 크리믈 폭포(Krimml Waterfalls)에 피크닉을 다녀오기도 했다. 폭포 위 활짝 뜬 무지개까지 더해지며 줄리안의 집에서 써 내려간 우리의 동화는 해피엔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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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믈 폭포 사이로 활짝 뜬 무지개 |
독일 국경까지 약 6㎞를 앞둔 지점, 오스트리아 쿠프스테인(Kufstein) 인근까지 우리를 태워준 운전자 역시 여성솔로 드라이버였다. 이런 상황이 더는 특별하지도 않다. 국력이 높을수록 여성 인권도 높다는 점을 직접 목격하는 건 흥미로운데, 왜 운전자를 만나기까지의 시간도 점점 증가하는 것일까? 이것 또한 새롭다.
뮌헨(Munich)은 대도시라 피하고 싶은 목적지지만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장시간의 기다림 끝에 어렵사리 만난 운전자 덕분에 이곳에 발을 들였다. 중간에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냥 뮌헨까지 오긴 했는데, 실로 오랜만에 맞닥뜨린 대도시 풍경과 도시사람들 때문에 시골에서 막 상경한 듯한 우리의 누추함을 더 느끼며 화려한 도시의 첫인상을 삼켰다. 이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를 어디에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고민하는 일은 내일로 미루고 하룻밤 캠핑 대신 숙박을 했다. 누추함을 벗고 어찌됐든 도시를 즐겨야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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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독일을 뜻하는 ‘D’를 적은 보드판을 들고서 히치하이킹, 독일의 대표음식인 독일식 돈가스 요리 ‘슈니첼, 뮌헨만의 특별한 관광지, 도심 한복판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 |
그래 봤자 뮌헨에서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까지 약 70㎞,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슈투트가르트(Stuttgart)까지 약 150㎞, 슈투트가르트에서 라슈타트(Rastatt)까지 약 100㎞ 거리에 불과할 뿐이다. 다시 말해 뮌헨에서 라슈타트까지 총 320㎞를 이동하는데 3박 4일이나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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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투트가르트 외곽 지역에서의 하룻밤 캠핑 |
마지막 여정인 라슈타트에서 프랑스 북동부 국경마을 비상부르(Wissembourg)로 향하는 40㎞ 남짓 짧은 구간도 속도의 움직임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곳에서 여행 중인 스와미 친구를 만나 그의 차를 타고 최종목적지 벨기에 남부로 가는 동안 우리의 히치하이킹 여정도 마침내 그 끝을 향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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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부터)아우그스부르크에서 즐긴 캠핑요리, 뮌헨만의 특별한 관광지, 도심 한복판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 히치하이킹 여정의 마지막 밤 |
유럽 히치하이킹 여행 ①~③ 전체 국가 이동 경로 그리스에서 알바니아까지 3주, 보스니아에서 프랑스까지 40일 정도로, 한국에서 보낸 한 달 정도를 빼면 대략 2달 동안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했다.
Route 그리스→알바니아→한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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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히치하이킹 여행 ①~③ 전체 국가 이동 경로 그리스→알바니아→한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8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