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동안 퇴사하지 못한 채 상사인 드라큘라에게 산 사람을 갖다 바쳐온 ‘렌필드’. 그는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경찰 ‘레베카’에게 영향을 받아 드디어 퇴사를 꿈꾼다. 드라큘라에게 90년 동안 가스라이팅 당한 ‘슈퍼 을(乙)’ 집사의 탈출기다.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주 옛날 고성을 사기 위해 ‘드라큘라’(니콜라스 케이지)를 찾아간 부동산 변호사 ‘렌필드’(니콜라스 홀트)는 드라큘라에게 취업 사기를 당해, 직속 비서로 90년 동안 밤낮없이 제물을 바쳐 왔다. 괴팍하고 사악한 꼰대 상사에 점차 피폐해져 가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드라큘라에게 바칠 제물을 찾던 중 자신의 인생을 뒤바꿔줄 경찰 ‘레베카’(아콰피나)를 만난 렌필드는 가슴 한편에 숨어 있던 퇴사의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벌레를 먹으면 생겨나는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구해내며 ‘히어로’로 불리게 된 그는 치료 모임에서 ‘관계 중독을 끝내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나 드라큘라에게 “이 지독한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퇴사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자, 드라큘라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한다.
↑ 사진 유니버설픽쳐스 코리아
영화는 드라큘라의 시종으로 그의 갑질을 견뎌내던 시종 렌필드가 상사인 드라큘라의 가스라이팅을 이겨내고, 자신을 사랑하는 최강의 힘을 깨닫게 되는 스토리다. 1897년 브램 스토커의 원작에 등장한 시종 ‘렌필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나, 공포 영화에서 가장 많이 묘사된 캐릭터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드라큘라의 클래식한 스토리를 ‘가스라이팅’과 ‘관계 의존’ 등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비틀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드라큘라의 몸이 박쥐나 안개로 바뀌는 CG는 좋았지만 드라큘라를 가두는 결계와 관련된 의문점 등 빈틈이 보이긴 한다. 배에서 내장이 튀어나오고, 사람을 터뜨려 죽이며, 몸에서 머리와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등 고어한 장면은 코믹한 소품 신처럼 느껴져 큰 거부감은 없다. 액션 신도 꽤 등장하지만 <존 윅4>가 얼마 전 개봉한 탓에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
아콰피나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조직 ‘로보 패밀리’에게 돈을 받고 범죄를 모른체하는 경찰 조직에 몸담고 있지만, 불의를 참지 않는 모습으로 극중에서 렌필드에게 처음으로 퇴사 욕구를 불타오르게 하는 주인공이다. 렌필드와 아콰피나 모두 문제적인 상사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렌필드 자신이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가 상사 때문에 나쁜 일을 하도록 가스라이팅당하는 장면에서는 현대의 수많은 ‘갑’들을 떠올리게 할지도 모른다. 직장 상사에게서 벗어나는 도비 탈출기이기도 하고, 가스라이팅을 소재로 한 슬래셔 무비로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렌필드>는 ‘B급 고어 영화’다.
하지만 이 불공평한 갑을 관계와 함께 ‘자유를 얻으려면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제를 버무리기엔 장르가 너무 마이너했을까. 드라큘라와 렌필드의 지질한 대화에서는 역시나 연기 잘하는 ‘두 니콜라스’의 면모를 보여주고, 여전히 아름다운 니콜라스 홀트의 훈남 비주얼이 니콜라스 케이지의 드라큘라 비주얼과 대비될 정도
로 돋보인다. 그러나 영화 속 여주의 캐릭터는 애매하다. 코믹한 역할을 많이 했던 아콰피나가 과거 스토리 때문에 너무 진지해지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B급 병맛으로 영화를 마무리했다면 어떨까. 쿠키영상은 없다. 러닝타임 93분.
[글 최재민 사진 유니버설픽쳐스 코리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78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