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부터 1996년까지 『소년 챔프』에 연재된 ‘슬램덩크’는 국내에서 지금까지 1450만 부가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지금도 이 슬램덩크 단행본 31권의 인증샷은 소셜미디어에 등장한다. 덕후들은 여전히 당시의 농구 전성시대를 기억한다. 그들에게 ‘슬램덩크’는 하나의 전설이다. 그 전설이 영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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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이 시기 단연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농구였다. 물론 프로야구, 축구, 배구 역시 구름 관중을 불렀지만 농구는 겨울 내내 한국을 들썩이게 했다. 소위 인기 연예인이 아닌 운동 선수에게 팬덤이 최초로 형성된 시기이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이 활약한 연세대 농구팀은 당대 최고의 인기 팀이자 선수들 역시 스타가 되어 코트와 미디어를 종횡무진했다. 그 시기 농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시카고 불스의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을 중심으로 미국 프로농구NBA 역시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마이클 조던의 농구 실력은 ‘하늘을 걸어 다니는 사나이’에 비유되었고 우리나라의 농구 덕후들 역시 시카고 불스의 수준 높은 경기를 보며 안목을 키웠었다.
그 무렵, 일본에서도 농구가 빅히트를 쳤다. 실제 스포츠가 아닌 만화였다. 바로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이다. 1990년 주간 『소년 챔프』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 만화는 애니메이션의 천국 일본에서도 압도적 인기를 구가했다. 6년여의 연재를 마친 1996년까지 잡지는 나오는 대로 매진이었고 단행본 만화는 무려 1억7000만 부가 팔리는 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슬램덩크’의 파고가 한국에도 밀어닥쳤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소년 챔프』에 연재된 ‘슬램덩크’는 잡지의 인기와 함께 단행본 31권으로 출간되어 국내에서 지금까지 1450만 부가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지금도 『슬램덩크』 오리지날 판 31권의 인증샷은 소셜미디어에 등장한다. 이 ‘슬램덩크’가 26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엔 영화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그간 많은 영화화 제의를 받았지만 고사했던 그는 이제 ‘슬램덩크다운 정신’을 스스로 납득하고 이를 영화에 담을 수 있기에 수락했다고 한다. 영화는 개봉 한 달째에 200만 관객(2월1일 기준)을 넘어섰다. 지금의 Z세대는 기억도 못할 만화 원작 영화에 M세대 즉 3040이 반응한 것이다. 1980년대 생인 3040에게 슬램덩크는 그저 하나의 만화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승부, 노력, 열정, 천재 vs 범재, 좌절, 승리 vs 패배라는 인생의 축소판이 담겨 있다. 하지만 10대 때는 ‘슬램덩크’에서 이 정신을 바로 찾지는 못했을 것이다. 화려한 농구 기술, 불타는 투지, 손에 땀을 쥐는 승부, 청순한 로맨스와 약간의 학원물이 갖는 교훈적인 모습만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서 ‘아 그때 장면이, 그 말이 바로 이거였구나’를 깨닫고 이를 다시 확인하려고 극장을 찾는 것이다. 이번 영화와 원작은 큰 틀에서 변화는 없다.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채소연의 한마디에 “아주 좋아합니다. 난 스포츠맨이니까요!”라는 무책임한 답을 하고 농구를 시작한 강백호. 당연히 농구의 룰도 모르고 심지어 운동화도 없던 그는 농구를 하면서 자신의 몸 안에 숨겨진 천재성을 끄집어낸다. 하지만 그는 이른바 ‘문제아’였다. 골칫거리였던 그가 북산 농구부의 5인방이 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오로지 노력과 연습이다. ‘왜 나는 농구를 하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답하기 앞서 그는 무려 2만 번의 슛을 던지며 진정한 농구 천재가 된다. 또 있다. 북산고 농구부 주장 채치수. 강백호가 사랑하는 채소연의 오빠인 그는 전국 재패라는 꿈이자 목표를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최강의 라이벌 산왕공고의 신현철 앞에만 서면 번번히 부족함을 느낀다. 그는 깨닫는다. ‘나는 지금까지 북산 vs 산왕공고가 아니라 신현철을 이기고 싶어한 채치수’였다라는 걸. 그리고 그는 개인플레이보다 팀을 위한 선수가 된다.
정대만, 그는 중학농구의 스타였다.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2년간 코트를 떠나며 사람들도 그를 잊고 그 역시 자신을 잃어버렸다. 코트에 다시 선 그는 자신과 싸우며 노력을 넘어선 집념을 갖게 된다. 포기하지 않는 선수, 그리고 남자가 되었다. 여기 또 한 명이 있다. 서태웅이다. 재능에 노력을 더한 그의 농구 실력은 월등하고, 누구나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만 그는 화합하는 법을 모른다. 한쪽 눈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도 오로지 끝없는 연습을 통해 감각으로 슛을 성공시켰듯, 그는 점차 팀플레이를 배우게 된다. 송태섭, 그는 농구 선수로서 최악의 조건이다. 168cm의 단신. 코트에 서면 그는 거대한 벽을 느낀다. 하지만 그에게만 보이는 코트의 틈이 있다. 그것은 좁은 공간, 그는 그것을 찾아내고 빠져나간다. 마치 인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 하듯이. 이들이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이다. 물론 이 문제아에 더해 조금은 하나씩 부족함이 드러났던 이들을 하나의 팀으로 만들어낸 안 선생님 역시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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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원작이 마지막에 보여주었던 최강의 농구부 산왕공고와의 대결을 그대로 보여준다. 원작 인물이 그대로 등장하지만 포커스를 조금 바꿨다. 그것은 2학년 송태섭이다. 사실 송태섭은 원작에서 주요 인물은 아니었다. 강백호, 채치수, 정대만 등에 비하면 불리한 신체조건의 그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 인물이다. 하지만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항상 원작에서도 스토리를 더 그리고 싶은 캐릭터였다’며 그를 애정했다. 그런 이유로 26년 만에 돌아온 작품에서 그 캐릭터를 선택한 것이다. 송태섭은 오키나와 출신이다. 그는 형 송준섭, 여동생 송아라가 있다. 이 삼남매 중에서 가장 농구를 잘하고 소질이 있던 이는 형 준섭이다. 하지만 준섭은 친구들과 바다 낚시를 떠났다 실종된다. 형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태섭은 농구에 매진한다. 하지만 그에게 농구는 버겁다. 단순히 ‘신장’ 같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공만 잡으면 누구나 태섭을 준섭과 비교하며 ‘농구는 준섭이가 훨씬 더 잘했는데’라고 결론낸다. 그래도 태섭은 포기하지 않는다. 공을 튀기고, 뛰고, 슛을 던지고, 빠르게 달리기 위해 노력한다.
주목받지 못하는 후보에게 원작자가 포커스를 맞춘 것은 아마도 작가가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이 사회 속에서 훨씬 많은 비주류와 범재들의 존재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 천재, 반항아, 기대주를 중심으로 북산고 농구부를 그렸던 작가 역시 이제는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그간 주변부에 있던 송태섭에게 미안함을 느낀 것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강백호, 서태웅보다 송태섭 같은 평범한 이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영화는 그들을 위한 작가의 애정이자 헌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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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인물이 모인 북산고 농구부. 하지만 이들 역시 개인적으로 들여다보면 다 약점이 보인다. 강백호는 스스로 천재라 생각하지만 이 넘치는 자신감을 점점 상실한다. 채치수 역시 마지막 순간마다 자신의 능력을 의심한다. 그리고 부상으로 2년여를 방황한 정대만, 혼자 농구를 하려는 천재 서태웅, 게다가 작은 키와 형에 대한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코트를 뛰는 송태섭. 이들은 어쩌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언더독underdog’이다. 물론 언더독이 루저는 아니다. 언더독의 원래 뜻은 싸움에서 밑에 깔린 개, 즉 궁지에 몰린 개다. 사회적으로는 약자를 뜻한다. 이 말의 시작은 1948년 미국 대선 때 사전 여론조사에서 뒤지던 민주당 해리 트루먼 후보가 공화당 토머스 듀이 후보를 개표 결과 4.4% 포인트 차이로 제치고 당선되면서다. 그 뒤 이 언더독이라는 용어는 약팀 혹은 약자로 지칭되었고 이들이 이른바 강자인 ‘오버독overdog’을 이기기 것을 ‘언더독의 반란’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가끔 스포츠 경기에서 언더독의 반란을 발견한다. 지난 카타르월드컵이 그 대표적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메시가 지휘하는 우승팀 아르헨티나에 예선에서 2-1로 이겼다. 또한 호주는 유럽의 무시할 수 없는 강호 덴마크를 1-0으로 이겼고 일본은 독일에 2-1, 스페인을 2-1로 꺾어 파란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역시 포르투갈을 2-1로 이겨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최고의 언더독은 모로코이다. 모로코는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을 잡으며 아프리카 국가로는 처음으로 4강에 올랐다.
사람들은 언더독의 반란에 열광한다. 당연히 질 것이고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통쾌하게 깨지면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짜릿하기 때문이다. 물론 언더독에 대한 비판도 있다. 미국의 보수단체인 티파티의 마이클 프렐은 『언더도그마Underdogma』라는 책에서 언더독 반란과 효과의 부작용을 꼬집었다. 작가는 ‘마치 사회는 언더독을 힘이 약해서 그 이유만으로 선하고 고결하다고 믿고, 반대로 힘이 강한 자를 그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많이 가진 자에 대한 경멸과 덜 자진 자에 대한 유치한 찬양이라고 할 만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언더독의 반란에 여전히 환호를 보낸다. 그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불리한 환경, 감당할 수 없는 역경, 단점투성이의 시작을 이겨내는 극복의 스토리이다. 이는 사회적 약자, 한 번 패배한 자, 기회를 상실한 자에게 ‘다시 한 번’이라는 치유를 안겨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사회적 위치를 옮길 수 있는 사다리는 점점 철거되고, 계급은 공고해지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시대는 과거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더독의 반란을 꿈꾼다. 비록 그 현실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하더라도 꿈꾸는 자유는 통제하고 강제할 수 없다. 그러면서 가끔은 그 실제를 확인하고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올라온다. 그래서 스포츠에서 약자가 강자를 이길 때 우리는 더 열광하고 그들의 승리에 더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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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의 성공에는 승리의 영광이 아닌 패배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인격체로 존중 받으면서도 하나의 팀으로 승화되는 과정이 뚜렷했다. 북산 농구팀의 모토는 단순했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이다.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이 고독하고 괴로운 훈련을, 나를 의심하는 자신감 부족과 회의 그리고 불안을, 또한 재능만 믿고 노력을 게을리하는 나의 안일함을, 이것들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바로 ‘포기하지 않는 마음’뿐이라고 만화는 말한다. 때로는 그 모습이 처절하게 보여도 그들은 오로지 ‘농구’를 사랑하고, 그것을 선택한 청춘이기에 기꺼이 북산의 농구부가 된 것이다.
원작은 힘이 넘쳤다. 작가는 개개인의 캐릭터는 물론이고 서사, 인물 관계, 그리고 라이벌에게도 가치를 부여해 단순히 만화 속 인물이 아닌 현실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강백호에, 채치수에, 정대만에, 송태섭에 투영시켰다.
물론 그들에게는 능력이라는 천재성도 있었지만 작가는 이 천재성보다 위대한 것이 바로 ‘노력과 훈련’이라고 강조한다. 불에 데인 듯한 통과의례 같은 노력과 훈련, 그리고 피와 땀을 맛보았기에 이들은 승리를 만끽했고, 패배했을 때 눈물 또한 마음껏 흘릴 수 있었다.
우리는 스포츠를 그린 영화, 만화 등에서 천재를 쉽게 발견한다. 마치 마이클 조던의 현신처럼 하늘을 걸으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술로 상대를 압도하는 천재들을. 물론 이 천재들에게 숨겨진 서사는 클리셰처럼 존재한다. 복잡한 가족 관계, 자신의 운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 나에게 등을 돌린 환경과 심지어 연인까지. 해서 이 천재들은 마지막 순간 시상대의 제일 높은 곳에서 자신을 부인했던 모든 이들에게 트로피를 보여준다. 하지만 세상엔 천재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이들, 즉 범재들이 더 많다. 마치 꿈의 팀이라는 지구최강 미국 NBA올스타나 미국 올림픽 농구대표팀에도 후보 선수와 벤치워머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슬램덩크’는 천재들의 노력과 집념을 보여주면서 범재들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따뜻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력뿐이다. 눈을 감고 던져도 공이 림을 통과할 수 있는 감각을 익힐 때까지 그저 던지고 또 던질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천재가 항상 범재를 이기고, 범재가 통쾌하게 천재를 이기는 것도 아니다. 단지 확률이다. 천재가 더 이길 수 있는 확률과 가능성이 높지만 여기서 ‘슬램덩크’가 놓치지 않는 것은 두 가지이다. 범재가 천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연습이고, 비록 실패하고 쓰라린 패배를 직면해도 범재가 그동안 흘렸던 노력의 땀은 언젠가 승리의 물방울이 된다는 점이다. ‘슬램덩크’는 언더독의 반란이다. 부족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넘치는 이들이 모여 하나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언더독인 그들에게 그래서 더 열광했고 26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을 찾고 기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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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이현(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NEW]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67호(23.2.21)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