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인물] "자연에서 삶을 투영하다" 조각칼로 인생 새기는 판화가 정순아

회화 같은 판화 작품…작가 "새 작품에 형상화 집중 하겠다"
전북 남원 도보책방서 12월 19일까지 개인전 개최

↑ '황금벌판' 시리즈 / 자료 : 정순아 작가 제공

늦가을 남도의 들녘에 바람이 입니다. 제멋대로 부는 바람에 벼 이삭은 꼿꼿했던 자신을 풀고,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배웁니다.

작가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마음으로 운전하다 문득 차창 밖 황금벌판이 너무 아름답고, 풍요로워 보였다고 했습니다. 처절한 삶을 겪었던 그녀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성의 깊이는 더해 가고 있습니다.

조각칼을 들고 작품에 열중하고 있는 정순아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슬며시 나는 유성물감과 판화를 찍는 잉크 등이 품어내는 내음은 전혀 화학적이지 않고 편안합니다.

진도 출신인 작가는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 한국화를 좋아했고, 화실을 다니며 회화에 열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에는 진도의 색채가 묻어나는 느낌입니다.

한동안 붓을 놓았다가 13년 전부터 다시 붓을 들었는데, 예전처럼 회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또 그러다 병상에 눕게 되는 시련도 찾아왔습니다. 이후 판화를 해 볼까 하는 생각에 시작한 것이 판화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조각칼로 판화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근심과 걱정 다 사라지고 마치 수행을 하는 것처럼 도를 닦는 기분으로 칼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작업에 몰두 합니다.

↑ 정순아 작가 / 사진 : 정치훈 기자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어서 회화에 비해 가치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주변 시선이 있지만, 판화의 제작 과정을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회화는 완성 후에도 여러 차례 덧칠 등으로 수정이 가능하지만, 판화는 칼 끝 하나만 잘 못해도 새로 다시 판을 새겨야 하는 정신 집중형 작업입니다. 또, 여러 색깔을 동시에 찍을 수 없고 한 가지 색을 찍고 유화 물감이 마를 때까지 3~4일을 또 기다려야 다음 색을 찍을 수 있습니다. 색이 겹치거나 번지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건 부지기수. 작품 하나 제대로 찍는 데 한 달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인내의 작업인 셈입니다.

그렇게 찍어낸 정 작가의 작품은 마치 회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조각칼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고 판화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한 선을 볼 수 있습니다.

↑ '황금벌판' 시리즈 / 자료 : 정순아 작가 제공

작가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며 작가 노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추석에 고향을 내려가는 차창 밖으로 가을 벌판에 바람에 살쪄서 곧 등이 터질듯한 벼들이 노랗게 물들어 풍요롭고 복되게 마구 출렁거렸습니다. 우리 세상이 이렇듯 풍요로워서 모든 것을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삶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황금 들판의 벼가 저의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바람이 통했을까요? 출렁거렸을까요?

조각칼로 빚어낸 황금벌판에는 수많은 조각칼 자국이 남았지만, 어느 하나 성내지 않고 날카롭지 않으며 따뜻한 온기 담은 선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작가는 마음의 형상화에 집념하고자 합니다. 작품을 바라보는 찰나의 시간에 관람객은 그 마음을 고스란히 받지 않을까요?

시간이 필요하다면 차분하게 볼 일입니다.

↑ '황금벌판' 시리즈 / 자료 : 정순아 작가 제공

윤익 광주 아트페어21 총감독은 "최근 미술시장이 자본에 의해 좌우되면서 목판화가 미술계에서 다소 소외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판화가 정순아가 병상의 시험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의 도약과 함께 목판의 숨결을 따라 패 내는 터치 한 편 한 편이 색상의 레이어를 쌓으며 '자신의 삶과 함께하는 마음의 대화'를 시도하는 의미를 부여함에 작업의 진솔함이 와 닿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판화가가 귀한 광주에서 독보적인 활동을 하는 만큼 아트페어를 통해 정 작가의 대표 작품 2점을 광주시립박물관에서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 복된가을벌판,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 정순아 작가 제공

정순아 작가(jsa5911@hanmail.net)는 개인전 13회와 아트페어 아트페어 9회, 국제교류전, 단체전 다수 참여했으며, 현재 한국 목판화협회, 광주 판화가협회, www.현대미술가회, 한국미술협회, 광주전남여성작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정순아 작가는 오는 12월 19일까지 전북 남원에 있는 북카페 도보책방에서 '오색실타래 황금물결이루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열고 있습니다.

또, 내년에는 서울과 광주 등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어 작품을 더욱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정치훈 기자 pressjeong@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