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아뜰리에에 선 조르주 루오. [사진 제공 = 전남도립미술관·ⓒYvonne Chevalier]](//img.mbn.co.kr/newmbn/white.PNG) |
↑ 1953년 아뜰리에에 선 조르주 루오. [사진 제공 = 전남도립미술관·ⓒYvonne Chevalier] |
'의인은 향나무 같아, 자기를 내려치는 도끼에 향기를 묻힌다.'
KTX순천역에서 택시로 15분쯤 가면 도착하는 광양 전남도립미술관 지하 1층, 프랑스 작가 조르주 앙리 루오(1871~1958)의 판화 연작 '미제레레' 49번 도판 제목이다. 악인의 칼날에 찍힌 뒤의 피비린내 속에서 숭고한 증거를 발견해내는 루오의 저 은유만큼 '사람의 아들' 예수의 비극적 드라마를 결정적으로 묘사한 문장은 다시 없을 것이다.
![전남도립미술관에 전시된 프랑스 작가 조르주 루오의 1922~1927년 판화 연작 `미제레레` 모습. 인간의 비참과 신의 구원을 판화 58점에 담아냈다. [김유태 기자]](//img.mbn.co.kr/newmbn/white.PNG) |
↑ 전남도립미술관에 전시된 프랑스 작가 조르주 루오의 1922~1927년 판화 연작 `미제레레` 모습. 인간의 비참과 신의 구원을 판화 58점에 담아냈다. [김유태 기자] |
![전남도립미술관에 전시된 프랑스 작가 조르주 루오의 1922~1927년 판화 연작 `미제레레` 모습. 인간의 비참과 신의 구원을 판화 58점에 담아냈다. [김유태 기자]](//img.mbn.co.kr/newmbn/white.PNG) |
↑ 전남도립미술관에 전시된 프랑스 작가 조르주 루오의 1922~1927년 판화 연작 `미제레레` 모습. 인간의 비참과 신의 구원을 판화 58점에 담아냈다. [김유태 기자] |
루오 불멸의 걸작 '미제레레'(1922~1927)가 한국을 찾았다. 프랑스 퐁피두센터와 조르주루오재단 소장품 약 200점을 모은 '인간의 고귀함을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 전이다. 한국에서 루오 전시가 열리는 건 2009년 이후 13년 만으로 내년 1월 29일까지 열린다. 연민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 정금같은 붓의 흔적을 지난 17일 살펴봤다.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1953년 아뜰리에에서 흰옷을 입고 일생의 걸작들 앞에 선 루오의 대형사진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
↑ `겨울Ⅰ`(18X29cm). |
 |
↑ `가난한 가족2`(19X26.7cm). |
 |
↑ `탈주자들`(14x23.5cm). |
루오의 초기작은 대개 어둡고 음울한 인간 세계의 풍경을 담았다. 굵은 선 안에 잿빛으로 그려진 침묵하는 얼굴들이다. 눈코입 없는 표정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이 어디론가 향한다. '탈주자들'(1909), '가난한 가족'(1911), '겨울Ⅰ'(1912)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등이 굽어 있고 하늘 대신 땅을 쳐다보며 걷고 있다. 장미라 학예연구사는 "도시의 거리를 고개를 숙이고 걷는 행인 모습은 인생의 무게와 고단함을 느끼게 한다. 파리 코뮌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루오는 동시대 아픔과 슬픔에 공감했다"고 설명했다.
육신과 정신을 동시에 말살시킨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참상을 목격한 루오는 운명의 놀이에 휩쓸린 약자가 겪은 빈곤과 궁핍에 집중했다. 그 관심은 생활이란 무게 앞에서 웃음(광대)과 몸(매춘부)을 팔아야 했던 '밑바닥' 인간에 가닿았다. 결국 루오는 그들의 무표정에서 신께 의지하려던 마음을 발견해 20세기 최고의 종교작가, 아니 20세기 유일한 종교작가로 기억된다.
그래서인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미제레레'를 관람하는 일은 한 번의 고요한 미사를 홀로 드리는 것과 같다.
 |
↑ `미제레레` 8번 도판 `분장하지 않는자, 그 누구인가?`(64.7 X 50.5cm) |
먼저 단어 '미제레레'부터 곱씹을 필요가 있겠다. '미제레레'는 구약성경 시편 51편의 라틴어 문장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miserere mei Deus·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의 첫머리를 딴 축약어로, 루오가 아버지를 잃은 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하는 등 금이 쩍 갈라진 세계 위에서 인간 구원을 바라며 남긴 작품이다. 도판에 옮겨 한권으로 꿰맨 작품집 제목이 바로 '미제레레'다. 수록작은 58점으로 1~33번 도판은 '구원', 34~58번 도판은 '전쟁'이 주제다. 이번 전시에서 '미제레레'는 제4전시실 3개 벽면을 높이 채웠다.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 십자가 아래의 예수, 어머니와 아들, 장님과 점쟁이, 매춘부와 해골 등이 나오는 '미제레레' 작품은 불행이 비켜가는 법 없던, 맹목적인 희망조차 허락되지 않던 시대의 인간 마음을 담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무채색의 무게가 관람객의 정수리를 납덩이처럼 짓누른다. '미제레레' 8번 도판 '분장하지 않는 자, 그 누구인가'는 그 정서를 압축한다. 반쯤 감긴 퀭한 눈빛의 광대가 초점 없이 정면의 관람객을 거울처럼 응시한다.
![`미제레레` 출간 당시 사진. [사진 제공 = 전남도립미술관·조르주루오재단]](//img.mbn.co.kr/newmbn/white.PNG) |
↑ `미제레레` 출간 당시 사진. [사진 제공 = 전남도립미술관·조르주루오재단] |
서커스와 광대는 루오에게 절대적인 화두였다고 한다. 광대는 시대를 견딘 모든 이들의 자화상이자 현시대 우리 모두의 모습과도 같다고 해석된다. 가면 벗겨진 광대의 얼굴은 모욕과 불행을 딛고 '인생이라는 힘겨운 직업'을 살아내는 중인 우리 자신의 표정을 이룬다. 인간의 말과 행동에 개입하지 않고, 단지 인간을 바라보기만 하는 신의 시선(루카치)이란 착각을 건넨다. 2016년 루오의 '미제레레' 해설집을 출간했던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신부는 이번 전시 도록에 실은 글에서 "다른 화가들이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다양하게 그린 것과는 달리 루오는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슬픔과 한탄의 소리도 함께 그렸다. 루오는 자신을 영원을 향한 순례자처럼 여기며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고 평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주제 삼은 제5전시실은 루오의 화풍이 무채색에서 자연을 '초월해버린' 빛으로 변모해가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공간이다. 25세 무렵 그린 초기작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녀들'(1895~1897)과 달리, 루오는 점점 굵은 선의 거친 붓질로 변화해간다. '만남'(1935)은 등대로 가는 방파제 위에서 두고 예수와 두 행인이 마주보는 모습을 그려냈다. 장 학예연구사는 "바다를 좌우에 둔 방파제 길은 왼쪽의 현세와 오른쪽의 내세를 잇는 하나의 길로 해석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
↑ `어린 피에로`(78.1X53.5cm). |
벽면에 적힌 루오의 어록도 미술관을 걷는 내내 깊은 사유의 시간을 허락해준다. '나는 깊이 패인 주름 속에 고통을 겪는 자들의 말 없는 친구요, 문둥병 든 벽 위에 매어 있는 영원한 비참함의 넝쿨입니다'는 루오의 연민을, '고통이나 비참함 앞에서 달아나지 마라. 덧없는 이익들, 특권들, 일시적인 명예들 때문에 네 자신 안에 네가 그리도 잘 느끼고 있는 것의 가장 작은 조각도 양보하지 마라'는 루오의 생의 자세를, '망령과 가면으로 횡행한 이 불안의 세상에는 평화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루오의 시대인식을 압축한다.
1947년 미완성 작품 315점을 화로에 넣어 불태워버리는 루오의 20분짜리 동영상도 재생된다. 루오는 아뜰리에를 내주고 모든 작품을 구입했던 볼라르를 후견인으로 뒀는데, 볼라르의 급사 이후 그의 유족들은 루오의 작품 800여
점을 두고 소송을 벌였다. 최종 승소 후 작품을 돌려받은 루오는 자신의 작품에 불을 지른다. 루오의 작품은 말년에 이르러 찬란한 색감과 고요를 되찾았는데 '어린 피에로'(1945)의 미소는 '죽음을 앞둔 그의 표정은 선해 보인다'는 후세의 평가가 썩 잘 어울린다.
[광양 = 김유태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