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제(1986), Mixed media on paper, 101.5 x 71.5 cm [사진 제공 = 가나아트]
형체가 모호하니 더 자유로와졌다.
노은님(76)의 1986년 추상화 '무제' 녹색 바탕 가운데 화사한 연보라색은 거대한 꽃 같다. 널직한 보라빛에 손가락으로 긁은 흔적들이 율동감을 준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개인전 '마리타가 만든 정원(Marita's Garten)'이 가나아트 보광에서 26일까지 열린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위주 작품 20여점을 펼쳤다.
그는 식물과 동물이 합쳐진 생명체 이미지를 통해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자연의 힘을 표현하는 작가로 유명하지만, 이번 개인전은 과거 전위적인 설치 작업과 색채 추상 회화 위주로 모아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든다.
↑ 초록 나무들 사이에서(1987), Mixed media on paper, 71.5 x 101.5 cm [사진 제공 = 가나아트]
작가는 자연을 구성하는 물질에 대한 본인만의 해석을 독자적인 색채 추상으로 일궈냈다. 세상 만물이 물, 불, 흙, 공기로 구성됐다는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4원소론은 각각 파란색, 빨간색, 밤색, 검정이나 흰색으로 평면 회화를 구성한다. 형체가 없어도 겹겹이 쌓이는 색의 향연이 강렬하다. 꽃이나 자연에서 비롯된 이미지가 거대한 색과 면으로 단순화되고, 간혹 눈이나 발 등 생명체의 흔적도 숨어 있다.
↑ 무제 (1986), Mixed media on paper, 118.7 x 180 cm [사진 제공 = 가나아트]
독일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작가는 전화 인터뷰에서 "비싼 물감을 마구 써서 그렸는데도 결국 간장 색깔로 변해버려 절망하던 시절을 겪었다"며 "1984년경 노르웨이 친구 집에 놀러갔다 하얀 눈 위에 놓인 노란 낙엽을 발견한 순간 색깔 표현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와졌다"고 말했다.
함부르크대학에서 바우하우스 출신 한스 티만(1910~1977)을 사사한 작가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리라는 티만 교수 가르침을 따라 평생 붓을 가지고 놀았다"며 "나는 그저 나의 기본적인 감정을 표현했을 뿐"이라고 전했다. 티만이 추상회화 대가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의 제자여서인지 작가 그림에서 그들의 체취도 느껴진다.
↑ 마리타가 만든 정원(Marita`s Garten) (1999), Acrylic on canvas, 40 x 49.8 cm [사진 제공 = 가나아트]
전시 제목 '마리타가 만든 정원'은 그의 제2 작업실이 있는 미헬슈타트 고성을 알게 된 계기이자 1999년 현지에서 열었던 개인전 제목이다. 그룹전에 함께 했던 화가 한스 시버딩의 부인 마리타의 가든 파티에 초대받아 그녀가 가꾼 아름다운 정원과 미헬슈타트의 자연에 반해 정착하게 됐다. 추운 북독일 함부르크 작업실에서 따뜻하고 온화한 남독일로 옮겨오자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와 생에 대한 기쁨으로 넘쳐나는 화풍으로 변화했다. 한국인 최초로 국립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 정교수가 된 작가는 2019년 독일 태생이 아닌데도 이례적으로 미헬슈타트시립미술관에 영구 전시관을 여는 영예도 누렸다.
1층 설치작업 '내 짐은 내 날개다'(1986)는 붉은 흙이 양탄자처럼 둥그렇게 깔리고 그 위에 종이로 만든 옷, 그 위에 달려진 돌과 무거운 시멘트 밑창의 한지 신발로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하는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고국을 떠난 작가의 디아스포라적 삶에 대한 고민이 읽힌다. 그 옆에 붉은 실뭉치가 천장에서부터 길게 늘어뜨러진 작품은 '무제'(1987)로 작가가 탯줄같은 붉은 실을 태아처럼 감고 눕는 퍼포먼스 했던 흔적이다. 전
시장에 설치된 바바라 쿠젠베르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내 짐은 내 날개다'(1989)를 보면 자연의 신비를 예술로 풀어가려는 작가의 고뇌를 보게 된다. 도교 영향을 받은 작가는 "내가 태어나고 죽는 것은 우연도 당연도 아닌 것"이라며 생명과 자연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이한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