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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Disconnection of the Senses (감각의 단절)_Oil on Canvas_130.3 x 162.2 cm, 2022 [사진 제공 = 스페이스 K서울] |
키를 훌쩍 넘기는 초대형 그림 속에 인간의 뇌나 위 같은 장기들을 적출한 듯한 도살장 이미지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본 듯 하면서도 생경한 도상들은 인체 내부의 물리적 공간 같기도 하고, 정신적인 영역으로 확장된 어떤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도 같았다. 초현실주의자 살바로드 달리 그림처럼 사람의 코나 뇌 같은 표상이 반복적으로 그림 곳곳에 숨겨져 있기도 했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환각을 재해석해서 보여준 그림들이다.
서울 마곡동에 있는 미술관 스페이스K서울이 처음 선보인 한국의 신진 작가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 작가의 드로잉와 회화 31점만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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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민 작가와 작품-스페이스K 20220308 [사진 제공 = 스페이스K 서울] |
온순한 모범생이던 작가는 20여년전 서울대 미대 1학년 때 원인 모를 고통에 쓰러졌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원인을 찾다가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복학후 처방된 약을 먹으며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입원 기간 경험했던 환각과 환청, 환후는 그의 뇌리에 각인됐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그 기억을 끄집어내 해체 재해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Paranoia Sequence(피해망상의 배열)'은 분노에서 시작해 자책으로 끝맺는 피해망상의 단계적 과정을 연작의 형식으로 담았다.
가로 10m의 거대한 작품 'Matter Cloud(문제 구름)'은 기억과 상처의 퇴적물이 거대한 구름덩어리를 이루고 그 사이에 생겨난 기생체가 기억을 빨아먹으면서 번식하는 풍경을 담았다.
국내 출판계에서 조현병 등 정신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자기고백 서적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 성소수자 담론이 최근 활발해진 국내 미술계에서도 또다른 소수자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신병력의 작가가 일종의 '커밍 아웃'을 한 셈이다.
이 작가는 "환각 자체가 저에게는 무서움, 불쾌감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는 작업이 고통스럽지 않았다"며 "의식의 흐름같은 자동기술법 과정처럼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편이다"라고 담담히 밝혔다. 다만 붓질의 방식이나 색감 배열은 반복적이고 습관화된 탓인지 상당히 원숙한 느낌이다.
그는 "사회가 효율적인 통제 관리를 위해 병을 사회적으로 진단하는, 일종의 정의(definition) 내리는 방식이 폭력적이라고 여겨졌고 어찌 보면 제 작업의 계기가 됐다"며 "미술을 통해 작가가 다른 방식으로 긍정적으로 정의를 내리는 일을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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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ueprint (설계도)_Oil on Canvas_116.8 x 80 cm, 2021 [사진 제공 = 스페이스K 서울] |
모두에게나 치열한 삶이지만, 이 작가는 그만의 평범한 일상에서 격렬하게 싸워 왔다. 약이 떨어질까봐 겁난다는 작가에게 해외 여행은 달갑지 않다. 그는 가급적 단순한 일상을 꾸린다. 밤에라도 영감이 떠오르면 달려가 작업할 수 있게끔 집과 작업실도 아주 가깝게 두고 있다. 한때 과학자를 꿈꾸기도 했을 정도로 컴퓨터 그래픽이나 IT기술 등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직접 음악도 작곡할 정도로 창조적 아이디어가 넘친다.
일본 대표 현대미술가 구사마 야요이 등 정신질환 경험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작가처럼 이근민 작가가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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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ining Hallucinations (환각을 다듬다)_Oil on Canvas_116.8 x 91 cm, 202 [사진 제공 = 스페이스K 서울] |
전시는 5월 18일까지.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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