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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brief discourse (for Sir Thomas Browne) [사진 제공 = 가나아트] |
불규칙한 원통 도자기 병 몇몇이 철제 서랍 안에 담겨있다. 얼핏 일본 주점이나 한옥에 배치된 도자 진열장과 유사하지만 무언가 다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용도를 알 수 없는 철판이나 황금 빛 도판이 함께 배치돼 새로운 색의 면이 일종의 입체적인 구상 작품으로 변신했다. 정물화를 통해 형이상학적 회화를 연구한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모란디의 입체 작품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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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nday Morning, 2021 [사진 제공 = 가나아트] |
세계적인 도자·설치 예술가 에드문드 드 발(57)의 국내 첫 개인전 'Their bright traces(그들의 빛나는 흔적들)’이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와 한남동 가나아트 나인원에서 4월 3일까지 열린다. 2013년부터 올해 1월까지 만졌던 최신작까지 10년간 대표 작품 총 35점이 소개됐다.
영국에서는 2010년 베스트셀러 'The Hare with Amber Eyes(호박눈을 한 토끼)' 저자로 더 유명한 작가는 도예, 설치는 물론 저술, 전시기획까지 맹활약하는 전방위 예술가다. 캠브리지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영국 도예가 제프리 휘팅(1919-1988) 견습생활과 일본 도쿄 메지로 도자 공방을 거쳐 동·서양을 아우르는 현대적 도자 미학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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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ir bright traces, 2021 (detail 1) [사진 제공 = 가나아트] |
그는 도자의 제작과 배치를 시의 한 형태로 이해하고, 마치 단어를 배열하듯 배치해서 때로는 조각을, 때로는 공간을 압도하는 설치 작품을 제작한다. 배치하는 과정에 있어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간극(interstice)이라고 한다. 작가는 "두 오브제 사이의 간극에서 엄청난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한다. 비록 모든 것이 단일의 것에서 시작할지라도, 하나 옆에 또 하나를 놓고, 그 사이의 간극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내게 완전한 깨달음의 순간이었다."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와 같은 도예 종주국에서 자기 자체의 기술적 완성도에 집중하는 동안 이 서양 도예가는 도예를 철저히 오브제(물건을 본래 용도에서 분리해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는 상징적 물체)로 삼고 음악과 시 등 융합적 맥락을 넣어 도예설치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그처럼 도자를 설치에 활용한 중국 반체제 작가 아이웨이웨이와 협업한 적도 있지만 아이웨이웨이는 도자를 설치의 소재로 활용하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드발의 작품 앞에 서면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그릇들이 기능은 없어지지만 역사와의 연결성 때문에 경건하고 신비한 기운을 소환하게 한다. 특히 진열장은 무반사 유리를 쓰면서 공간이 떠있어 보이게 특별히 제작해 비현실적인 이미지도 극대화한다.
작가는 "작품을 만들 때 한 문장의 시나 음악, 특정한 장소 등에 매혹된다"며 "사물은 어떻게 기억을 구체화하는가, 특히 이를 통해 어떻게 기억을 붙잡아 둘 수 있는가가 나에게 있어 진정한 문제이다"라고 전한다. 그의 작품 제목 대부분이 시나 음악에서 따온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장소 특정적인 설치작업이 탁월하다. 지난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때 아테네오 베네토에서 'Library of exile(추방의 도서관)'전시와 유대교 회랑에서 가진 디아스포라 역사를 반영한 전시를 작가도 가장 중요하다고 꼽는다. 강제추방당한 저자들의 책 2000여권을 모아두고 외벽에는 도자기 원료인 백색 고령토로 덮고 흑연 목탄 등으로 사라진 도서관 이름을 적고 지우는 과정을 통해 인류 문화 유산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작가는 국내 전시를 위해서 이 설치작품 개념을 계승해서 테이블 형태를 만들고 고령토 위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쓰고 지우는 작업을 해 전시 제목과 동일한 작품명을 붙였다. 올해 1월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을 정도로 애정을 실었다고 한다.
뉴욕 프릭컬렉션에서 고전 명화와 함께 기획된 전시도 압권이었다. 철강왕 헨리 프릭의 대저택을 개조한 미술관의 소장품인 신고전주의 화가 엥그르의 여인 초상화 앞에 하얀 도자가 배치된 진열장, 램브란트의 초상화와 자화상 앞쪽에는 강철로 만든 검은 빛 진열장이 마치 공중에 뜬 것처럼 겹쳐 놓아지면서 현대와 연결되는 관계성을 새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같은 대표 작품들이 갤러리의 백색 벽 안에 덩그러니 전시돼 맥락이 사라진 점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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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코로나19 격리시기 만든 winter pot 연작, 2020 [사진 제공 = 가나아트] |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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