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정 욕구' 솔직해지고 타인 욕구 이해하자"
"어려움·상처가 길잡이 돼…희망 놓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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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MBN |
'재심 전문 변호사'로 잘 알려진 박준영 변호사가 자신의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청년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때로 고난은 자신의 나아갈 길을 선명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16일 삼송 MBN 스튜디오에서 '해보는 거야, Go for It!'을 주제로 진행된 'MBN Y 포럼 2022'의 문을 연 '개막쇼'에서 박 변호사는 "처음부터 재심 전문 변호사가 되겠다는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며 "부끄럽지만 억울한 분들을 돕겠다는 마음조차도 사실 부차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이 무죄 판결을 받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해 국내 대표적인 재심 전문 변호사로 자리매김했지만, 애초부터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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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MBN |
중학교 2학년, 모친을 여의고 난 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지낸 박 변호사는 고교시절 '무기 정학'을 받을 정도로 크게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어려움이 많았던 학창시절, 고독감과 박탈감, 무력감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은 '인정 욕구'에서 비롯됐습니다. 박 변호사는 "무기정학을 받았어도 질 나쁜 아이는 아니라는 것을, 고등학교 3년 허송세월 보냈지만 뒤쳐진 게 아니라는 것을,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해남 땅끝에서 배를 타고 30분 들어가야 하는 섬에서 자란 박 변호사는 지방의 한 국립대학교 전자공학과에서 1학년 1학기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입니다. 국내 몇 안 되는 고졸 출신 변호사인 것입니다. 고시 공부를 한 계기도 다소 엉뚱합니다. 군대 시절 만난 선임이 신림동 고시촌으로 공부하러 간다기에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속담처럼 '나도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박 변호사는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고시 합격 이후에도 길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박 변호사는 "고시에 합격한 뒤 남은 인생 탄탄대로일 거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사건이 안 들어오고 영업도 힘들었다"고 토로했습니다. 사건 수임을 위해서는 학벌과 경력, 인맥이 중요한 분위기였으나 자신은 모두 부족했다면서, 돈은 벌어야하니 '어쩔 수 없이' 국선 변호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자신을 움직이게 한 힘이 상당히 물질적이었다고 고백하면서 "국선 변호를 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생각보다는 돈벌이라는 생각이 앞섰다"며 "그럼에도 변호사이기에 사건을 통해 제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물질적 동기와 인정 욕구가 어우러져 지금의 '박준영'을 있게 한 계기가 됐다는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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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MBN |
2007년 5월 14일 새벽 경기 수원의 한 남고 매점 인근에서 10대 소녀가 숨진 채 발견된 '수원 노숙소녀 사건'은 박준영 변호사 경력의 이정표가 됐습니다. 당시 범인으로 지목된 7명이 옥살이를 마친 뒤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입니다.
박 변호사는 "저는 무죄를 받아내 이들의 억울함을 그리고 제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었다"며 "성질 급한 저는 2심인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왔을 때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사무실을 청소했는데, 사무실만 깨끗해졌다"고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이어 "3심인 대법원 재판 때는 보도자료를 만들어 여기저기에 뿌렸고 그제야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며 "그런데 저를 알리며 성공했지만, 제가 도왔던 사람들의 동정 받는 처지가 부각돼 이를 생각하지 못한 부끄러움도 컸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이후 저는 여러 사건을 맡았고, 재심 전문 변호사, 약자의 편에 서는 변호사란 영광스러운 수식어까지 얻으며, 지금의 제가 있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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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MBN |
박 변호사는 "나의 '인정 욕구'에 솔직해지고 타인의 인정욕구를 이해하자"고 제안합니다. 때로 어려움을 겪고 상처를 받을 수 있겠지만, 고난이 오히려 상황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만들고 가야 할 길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는 것입니다. 또 "사법시험 공부를 하게 만든 배 병장, 재심 전문 변호사의 길로 이끈 수원 노숙소녀 사건은 우연한 만남이었다"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힘이 되는 시건과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인정 욕구를 충족하고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과정에서 준비 부족, 능력 부족 등으로 부끄러울 때가 참 많았지만 하나씩 깨달아가고 얻어가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다"며 도전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2030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묻는 말에는 "무기징역 받은 분들, 20년 이상 옥살이한 분도 있다"면서 "그런 분이 희망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을 찾을 수 있었다. 희망을 부여잡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박준영은 누구
재심 전문 변호사입니다. 1974년생입니다. 우리나라 땅끝에서 배를 타고 30분 정도 가야 하는 노화도에서 자랐습니다. 노화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목포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군 제대 후 복학을 하지 않고 중퇴했습니다. 1997년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공부를 시작해 2002년 사법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후 수원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해 주로 국선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2008년 운명의 사건 ‘수원 노숙 소녀 살인 사건’을 맡았으며, 이는 국가기관의 도움 없이 형사 재판 재심에서 무죄를 이끌어낸 최초 살인 사건 사례가 되었습니다. 재심과 공익 사건을 주로 맡아 개인 재정은 파산 지경에 이르렀지만, 약자들의 억울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진실
[신동규 기자 easternk@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