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세종로 중앙에는 애국선현을 기리는 새하얀 동상들이 무려 37개나 서있던 시절이 있다. 군사 독재시대 통치력을 강화하던 수단으로 1964년 세워진 것이다. 하필 석고상으로 만든 탓에 내구성이 떨어지니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고 미관을 해친다는 비난이 커지자 결국 1966년 철거됐다. 이후 애국선열조성건립위원회가 나서 광화문에 이순신동상을 세웠다. 세종로와 태평로가 뚫려 있어 남쪽 일본의 기운이 강하게 들어온다는 풍수지리학자 주장 때문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하는 인물인 이순신 장군을 이곳에 세웠다.
대한민국 대표 상징 공간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정치·문화·역사적 맥락을 다시 살펴보자는 취지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특별전 '공간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광화문'이 17일부터 내년 3월31일까지 펼쳐진다. 때마침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고궁연화-경복궁발굴·복원 30주년 특별전'과 서울역사박물관의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 전시와 맞물려 서울 중심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는 기회로 삼을 만하다.
↑ 국가재건최고회의 신청사 이전 기념 1961년9월 [사진 제공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광화문은 1395년 9월 경복궁을 건설할 때 생겼으며, 1425년(세종7년)에 광화문이란 현재 이름을 가지게 됐다. 경복궁 남쪽 정문을 칭하지만 이곳에서 세종로 사거리에 이르는 넓은 길과 주변이 광화문 거리다. 조선시대 중앙관청이 집결된 육조거리 전통을 이어 현재도 정부청사 건물이 남아있다. 한때 서점이 20여개 달하고 다방 중심으로 지적 교류가 활발해 명동 버금가는 문화 중심지였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열정이 표출된 공간이었다.
↑ 복원된 광화문 정문과 중앙청, 그리고 세종로의 모습 1968년 [사진 제공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가 열리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체가 1961년 첫 현대식 쌍동이 빌딩이었던 정부 신청사(국가재건최고회의) 자리에 리모델링된 건물이다. 바로 옆 주한미국대사관은 당시 USOM(미국대외원조기관)건물로 사용됐다. 19층 높이 정부서울청사가 올라간게 1970년이다. 또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으로 추진되던 '우남회관'이 4·19혁명이후 시민회관으로 바뀌고 화재로 소실되자 그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1978년 들어섰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방문한 평양 대형문화시설에 충격을 받아 동서양 양식을 결합해 만든 것을 알고 보면 흥미롭다.
남희숙 관장은 "유교경전 서경에서 유래한 '광화(光化)'는 빛이 사방을 덮고 가르침이 만방에 퍼진다는 의미여서 코로나 힘든 시기 행운의 빛이 널리 비치길 기원한다"며 "역사적 흔적이 켜켜이 쌓인 곳의 의미를 발견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광화문은 626년 역사의 목격자이지만 경복궁을 허물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제가 아예 폐기하려 했던 곳이다. 국내 언론과 민심의 반발에 이어 일본 민예이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 주장으로 경복궁 동측 현 민속박물관 자리로 한때 옮겨졌고 1968년 불완전하지만 제자리를 찾고 2010년 재복원됐다. 월대 복원 등 숙제도 남아있다.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 일환으로 옛 조선총독부청사 건물은 1995년 철거됐다. 1946년초까지만 해도 '광화문통'으로 불리던 거리는 그해 10월 '세종로'로 개명하게 된다.
↑ 광화문통 아이 영화 포스터 1976년 [사진 제공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는 연대기순으로 변천사를 보여준다. 1부 '다시 찾은 광화문'에서 한국 현대사 출발의 중심임을 알리고, 2부 '광화문 거리 개발과 건설'에서 공간의 현대적 기반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3부 '광화문거리의 현대적 재구성'은 남북간 체제경쟁과 도심재개발을 짚어주고 4부 '광화문 공간의 전환'에서는 월드컵응원전과 촛불시위 등으로 2000년대 공간의 주체가 국가에서 시민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제시한다.
김권정 학예연구사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6·25전쟁 당시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이 나란히 걸렸던 건물이 총독부가 아니라 한국은행이라는 점 등 세부사항이 확인됐다"면서 "역사적 맥락에서 공간변천사를 보고 미래 교훈도 발견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한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