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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작가 아이사 혹슨 '슈퍼우먼: 돌봄의 제국' |
마스크를 끼고 방호복을 입은 필리핀 사람 3명이 블랙핑크 등 K팝 걸그룹 춤을 추는 영상 작품 가사가 의미심장하다. 발랄한 화면과는 달리, 코로나19 위기에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기본적인 처우는 좌절된 필리핀 의료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다. 필리핀 안무가이자 퍼포머 아이사 혹슨은 전대미문의 전염병 공포를 잠시 잊게 해줬던 K팝 걸그룹 음원과 춤을 차용하고 팝송 '슈퍼우먼' 가사를 개사한 영상 작품 '슈퍼우먼:돌봄의 제국'으로 팬데믹 시대 모순을 드러낸다. 분노를 터트리기 보다는 풍자와 유머를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난 8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개막한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대형 나무 말에 정예부대를 숨겨둔 고대 '트로이 목마' 같다. 코로나19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우리가 선택했던 드라마와 영화, K팝 등 가벼운 대중문화 매체 속에 팬데믹으로 첨예해진 인종·계층·세대·남녀 갈등이 똬리를 틀고 있다. 부담없이 작품을 보다가 사회 문제점을 깨닫고 진지한 성찰을 하게 된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년 역사상 첫 외국인 예술 감독인 융마는 미국 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에 영감을 얻어 이번 비엔날레 주제를 '하루하루 탈출한다'로 정했다. LA(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쿠바계 미국인 가족 3대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는 웃음으로 위장한 채 인종주의, 계급, 이민 등 사회 화두를 정면 돌파한다. 홍콩에서 태어나 파리 퐁피두센터 큐레이터로 재직한 융마 감독은 "이번 비엔날레를 통해 편견을 새롭게 정의하고 진정으로 대화를 시작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주제 선정이 좋을 뿐만 아니라 사유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도록 작가 41명 작품 58점을 엄선해 여백을 두고 배치했다. 수백명 작가 작품들을 나열해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은 여느 비엔날레 '난장(亂場)'과 달랐다. 대규모 작품들의 '물량 공세' 대신 주제를 심도있게 다룬 '소수 정예' 작품들로 호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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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작가 미네르바 쿠에바 대형 벽화 작품 `작은 풍경을 위한 레시피`. [사진 제공 =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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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키스탄 작가 바니 아비디 작품 '연설'. |
쿠웨이트 작가 무니라 알 카디리는 부유한 아랍인들만 등장하는 걸프만 지역 드라마에 이주 노동자 모습을 엉성하게 합성해 넣은 영상 작품 '비누'로 계층 문제를 꼬집는다. 부자의 화려한 일상을 위해 투명 인간처럼 일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지적한다.
호주 작가 리처드 벨은 심리상담을 통해 원주민과 백인의 오랜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영상 '호주인 긁기', 호주 첫 원주민 대통령이 당선돼 부의 재분배를 약속하는 가상의 설정에서 백인 부유층의 분개를 담은 영상 '디너 파티'로 시선을 끌었다.
2층 전시장에서는 코로나19로 불거진 인종차별을 다룬 중국 작가 하오징반 영상 작품 '나도 이해해···'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미국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후 '흑인의 삶도 소중하다' 시위가 퍼져가는 동안 베를린에서 동양인 차별을 경험한 작가가 과거 흑인폭동 장면과 가수이자 시민운동가 니나 시몬의 인터뷰 등을 병치해 차이와 공존을 성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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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작가 헨리케 나우만 설치 작품 '프로토 네이션' |
외국 작가들과 이메일 등 비대면 소통에도 완성도 높은 비엔날레를 펼친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코로나19 시대에 대중문화는 도피처이기도 하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힘을 준
이번 비엔날레를 관람한 안미희 경기도미술관장은 "잔잔한 감동과 깊이 있는 감상을 이끌어내는 작품 선정과 공간 연출이 돋보였다"고 호평했다. 전시는 11월 21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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