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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의 풍경 76-3' 연작 |
서울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서 만난 그는 "내 신체와 재료, 평면(캔버스)이 자연스럽게 만나 이룬 작품"이라며 "회화 바깥에서 회화를 본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대상을 그리는 일반적 회화와 달리 그의 몸 궤적이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1976년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신체의 풍경'을 처음 발표한 후 45년간 이 작업을 이어왔다. 화면 뒤에서 팔을 뻗어 선을 그리는 '신체의 풍경 76-1' 연작, 캔버스를 등진 채 선을 그리는 '신체의 풍경 76-2' 등을 두고 "저것도 예술인가"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묵묵하게 그의 흔적을 남겨왔다.
그러나 2018년 세계 유명 화랑인 페이스 갤러리 베이징점 개인전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화면 옆에서 붓을 들고 팔 길이만큼 휘저어 선을 그려 하트 모양을 이룬 '신체의 풍경 76-3' 연작이 경매에서 1억원을 훌쩍 넘기고 '완판' 행진을 이어갔다. 이번 신작 회화 34점도 전시 시작 전에 이미 완판됐으며 드로잉만 남았다. 예약을 해도 언제 구입할 지 예측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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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실험미술 거장 이건용. [사진 제공 = 갤러리현대] |
작품이 외면받을 때도 그는 "화면 뒤에서 혹은 화면을 등지고 그린 사람은 세계 회화사에서 나 밖에 없다"고 자신하면서 살았다. 다양한 색채 하트를 모은 '신체의 풍경 76-3' 연작 12점 앞에서는 "내 소원이 큰 뮤지엄에 100호 하트 100점을 거는 것이다. 앤디 워홀(미국 팝아트 거장)이 보면 울고 갈 것"이라고 당찬 포부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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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실험 미술 거장 이건용 |
어린이를 좋아해 서울 성수동 헬로우뮤지엄에서 미술 수업을 한 그는 "내 작업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이 친구가 되어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했다.
1970년대 군사 독재가 제한하는 일상의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선을 긋기도 했다. 손목과 팔꿈치를 부목으로 고정하고 이를 하나둘 풀면서 선을 그리는 '신체의 풍경 76-4' 연작은 억압받는 자의 생존 흔적이었다. 1979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쪼그려 앉아 분필을 바닥에 대고 좌우로 선을 그리고 전진하면서 두 맨발로 그 선을 지우는 퍼포먼스 '달팽이 걸음'도 같은 맥락이다.
유년시절부터 호기심이 많아 "왜요"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살았던 그는 홍익대 데생 시험 때 아폴로 조각상 뒤통수를 그려 합격했다. 당시 추상미술 거장 김환기 미대 학장이 이유를 묻자 "특별한 걸 그리고 싶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 새로운 회화를 탄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철학과 현상학을 공부하면서 미술 밖에서 미술을 봤고 신체 드로잉을 하게 됐죠."
다소 엉뚱한 그는 2000년 미국 샌디에이고에 사는 딸의 집을 방문했다가 홈리스의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삶에 매료돼 가출을 시도했다고 한다. "우연히 만난 백인 홈리스와 다니면서 새 인생을 시작해보려고 했어요. 오후 6시쯤 됐나, 떠나려고 하는데 멀리서 우리 딸이 '아빠'라고 부르면서 싹 웃고 있더라고요. 그 뒤에서 아내가 '안녕'하고 인사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죠. 홈리스가 '그래서 넌 안 돼'라고 하더군요. 그때 떠났어도 괜찮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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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의 풍경 76-2` 연작 앞에서 팔을 뻗은 이건용 작가. |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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