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1985년 출토된 인골. [사진 제공 = 문화재청] |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7일 이 인골이 성벽을 쌓는데 제물로 사용된 인신공희(人身供犧) 사례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인골 수습 당시 똑바로 누워 하늘을 보는 신전장 형태였으며, 곡옥(반달 형태로 다듬은 옥) 모양 유리구슬을 엮은 목걸이와 팔찌를 착용하고 있었다.
김헌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은 "무덤이 아니라 성벽 기저부 조성층 바로 위에 인골이 위치해 있어 인신공희로 추정된다"며 "제의에 사용된 토기, 말과 소 등 대형 포유류 늑골도 함께 출토된 것으로 보아 성벽을 쌓아 올리기 전에 견고하게 축조되길 바라는 인신공희가 거행됐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 |
↑ 지난 4월 경주 월성 서성벽에서 수습된 20대 여성 인골. [사진 제공 = 문화재청] |
20대 여성 인골은 2017년 수습된 인신공희 사례인 50대 남녀 인골 바로 옆에서 발견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 지점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약 1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1985년과 1990년 확인된 출처 불명의 인골 20구 이상 또한 성벽 축조 과정과 관련해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인골 20구가 한꺼번에 나와 집단 폭력 혹은 전염병, 하천 범람으로 인한 무덤 유실, 색다른 장례 풍습 등 여러 가설이 검토되기도 했다.
장기명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제물로 바친 동물뼈와 뒤섞여 있고 인신공희와 비슷하거나 높은 지점에서 발견돼 성벽 축조 과정에 들어간게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서성벽이 인신공희로 축조된 국내 유일 성벽으로 4세기 중엽부터 쌓기 시작해 5세기 초에 완공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축조 연대는 출토된 유물의 전수 조사와 더불어 탄소를 측정하는 가속질량분석기 연대 분석에 기반해 정확성을 높였다고 덧붙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월성이 파사왕 22년(101년)에 축조된 것으로 기록됐지만, 실제 축조 연대보다 많이 앞당겨진 시기로 여겨져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4세기 중엽에는 사로국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병합해 신라 국가가 탄생하는 시기였다"며 "인신공희를 할 만큼 월성 축조에 많은 공력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
↑ 월성 서성벽 인신공희 지점. [사진 제공 = 문화재청] |
월성 서성벽 조사 성과는 7일 오후 4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유튜브 현장설명회로 공개된 후 8일 관련 분야 전문가를 초청해 학술적 의미를 토론할 예정이다. 전문가 토론회는 1부 '월성 서성벽 구조, 축조 연대, 그리고 인신공희', 2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왕성 월성의 궁궐 배치와 성벽 축조 재료의 자연과학적 분석에 대한 조사·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전지현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