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 뒷면엔 'W.B Tom'이라는 글씨(붉은 동그라미 안)가 새겨져있다. |
![]() |
↑ 국새 대군주보 측면. [사진 제공 = 문화재청] |
자주독립국 조선을 알리기 위해 고종(재위 1863~1907)의 지시로 만든 '국새(國璽) 대군주보(大君主寶)' 뒷면에 왜 영어 이름이 새겨져 있을까. 한국전쟁 와중에 국외로 불법반출된 후 어느 외국인이 이름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오욕의 낙인이 새겨진 대군주보는 2019년 12월 재미교포로부터 기증받아 환수됐으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문화재청은 24일 국새 대군주보를 비롯해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 '국새 칙명지보(勅命之寶)', '국새 대원수보(大元帥寶)' 등 대한제국기(1897~1910) 제작된 국새 4개를 보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대군주보는 1882년(고종 19년) 7월 1일 제작된 것으로, 높이 7.9cm, 길이 12.7cm 크기다. 은색 거북이 모양 손잡이와 도장 몸체로 구성된 정사각형 형태 인장이다. 보면(寶面)에는 구첩전(글자의 획을 여러 번 구부려 쓴 전서체)으로 대조선국의 대군주라는 의미를 지닌 '大君主寶(대군주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외교, 고위 관원 위임장, 사령장, 대군주의 명으로 반포되는 법령 등에 날인한 국새였다.
대군주보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19세기 말 급변하던 국제정세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선왕실의 고민이 함께 담겨 있다. 당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앞두고 고종은 국가의 상징물인 국기(國旗)와 국새를 함께 만들도록 명했으며, 무위영(궁궐 수비를 맡은 관청)에서 호조의 예산을 지원 받아 완성했다. 즉 이 국새는 고종이 대외적으로 국가의 주권을 표시하는 용도로 국가 간 비준이나 공식 문서에 자주독립국을 지향하는 의미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총 6과의 국새가 만들어졌지만 '국새 대군주보'만 유일하게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대군주보는 갑오개혁을 전후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이에 대한 조선의 대응방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유물"이라며 "서체, 형태 재질, 주물방식 등 대한제국 이전 고종 대 국새제작 방식이 담겨진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알려진 유물이라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는 모두 대한제국 시기에 왕실 인장(印章·도장)을 전문적으로 담당한 보장(寶匠) 전흥길 등이 주도해 만들었다. 황제 명령을 알리고 관리를 임명할 때 쓰려고 제작한 도장이다. 대한제국이 거행한 의식을 정리한 '대례의궤'(大禮儀軌) 등 관련 문헌에 형태와 재료, 크기 등이 상세하게 기록됐고, 당시 발행한 공식문서에 찍힌 사례가 있다.
일제는 한국 국권을 침탈하고 6개월 남짓 지난 1911년 3월 일본 왕실을 관리하는 궁내청에 국새 3점을 넘겼다. 이후 미군정이 1946년 8월 15일 궁내청에서 환수했고, 총무처를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됐다.
제고지보는 1897년 9월 19일 완성됐다. 손잡이 부분 용은 정수리에 점무늬가 있고, 머리에는 뿔이 솟았다. 코에는 구름 모양 형상을 새겼고, 입은 이빨 두 개가 돌출됐으며 여의주를 물었다. 등은 동그랗게 말아 위로 올렸다.
칙명지보는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문서에 사용하려고 1897년에 만든 국새 10점 중 하나인 동명 국새 '칙명지보'보다 작은 도장이다. 제작 시기는 1898년 윤3월 19일이다. '칙명'(勅命)은 황제가 관료에게 내린 명령을 뜻한다.
대원수보는 대한제국이 1899년 6월 22일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는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제작한 도장 3점 중 하나다. 대원수는 원수부의 우두머리이자 군을 이끄는 최고 지휘자이다.
문화재청은 국새 4점에 대해 환수 문화재로서 역사적 상징성, 조형성, 희소성을 갖췄다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전지현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