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시립미술관 기증된 임직순 1978년작 '포즈'. |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의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이 가열되자 이미 기증받은 국공립미술관들이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 컬렉션' 일부를 기증받은 대구미술관과 전남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은 6일 "삼성가의 기증 취지에 맞게 우리 미술관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고 이건희 회장 유족들은 작가의 고향 지역 미술관을 선택해 기증했다.
유족의 취지와 상관없이 전국 지자체들이 이건희 미술관을 짓겠다고 나서는 이유는 대통령 말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참모회의에서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미술품을 기증한 정신을 잘 살려서 국민이 좋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별도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게 알려진 후 지자체들이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가장 먼저 박형준 부산시장이 지난 2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이건희 미술관, 부산에 오면 빛나는 명소가 됩니다'라는 글을 올려 유치 희망 의사를 공표했다.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태어난 경남 의령군도 지난 3일 보도자료를 내고 "이 회장의 선대 고향인 의령에 이건희 미술관을 유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허성무 경남 창원시장은 경남지역 현안 간담회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창원관을 유치해 그 안에 이건희 미술관을 짓자"고 주장했다.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수원갑)도 삼성전자 본사와 이건희 회장 묘소가 있는 수원시에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지자체들보다 앞서 미술계 인사 100여명은 지난달 30일 이건희 회장 기증품을 기반으로 한 '국립근대미술관' 건립 추진 주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런데 이건희 미술관 유치 경쟁 속에서 정작 중요한 유족의 뜻은 빠져 있다. 삼성가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꼭 있어야 할 소장품을 신중하게 골라 각각 문화재와 고미술품 9797건(2만1600여점), 한국·서양 근현대미술품 226건(1488점)을 기증했다. 이건희 회장이 공들여 수집한 컬렉션 가치를 더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것이다.
삼성가 측근에 따르면 유족이 조건 없는 기증을 했지만,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건희 컬렉션 전시실'이 생기길 바랄 뿐, 이미 기증한 미술품을 모두 회수해 소장하는 이건희 미술관 건립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근대미술관은 미술계 오랜 숙원이지만 이건희 회장 기증품을 추진 동력으로 삼은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미 기증받은 근현대미술품 1488점 중 근대미술품 460여점을 그 곳으로 보내면 이건희 컬렉션이 또 흩어지기 때문이다. 격동기를 보낸 한국미술사에서 근대와 현대를 나누는 시기도 해방과 한국전쟁 등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주비위원회가 서울시 소유 송현동 문화공원부지나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요청했지만 서울시가 송현동 부지를 내놓을지도 미지수다. 과거 문화체육관광부가 서울시 소유 용산가족공원에 국립한국문학관을 지으려고 했으나 온전한 생태공원 조성계획에 어긋난다는 서울시 반대에 부딪혀 은평구 진관동으로 옮겨 진행중이다.
현재 문체부는 대통령 지시 대로 이건희 회장 기증품 관련 특별관을 비롯해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 1990년대말 본격 논의후 2013년 개관까지 10여년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국립근대미술관이 언제 문을 열 지 예측하기 힘들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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