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팝에서 K팝 아이돌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는 이유다. 일본 매니지먼트사는 최근 한국 연예기획사와 손을 잡고 아이돌 제작에 나서는가 하면, 자사 그룹에 K팝 요소를 입히고 있다. 아시아 아이돌 그룹의 발상지인 일본에서 K팝 시스템을 차용하는 '한일 아이돌 시스템의 역(逆)수출' 현상을 살펴봤다.
◆ 트와이스 JYP와 워너원 CJ를 배운다
JYP가 일본에서 지난달 시작한 니지 프로젝트에는 수천 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할 걸그룹을 선발해 데뷔시키는 프로젝트다. 지원은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15세부터 22세까지의 전 세계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
한마디로 일본판 트와이스를 제작하겠다는 구상이다. 트와이스는 지난해 말 일본 대표 연말 특집 프로그램 NHK '홍백가합전'에 K팝 걸그룹 최초로 2년 연속 출연하며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그해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우수 작품상'도 받았다. 발랄한 이미지에 수준 높은 군무 실력이 인기 요인이다. 전체 9명 멤버 중 3명을 일본인으로 꾸린 것도 한국 걸그룹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데 한몫했다. 이에 오래전부터 여러 일본 음반사와 기획사가 JYP와의 협업을 꿈꿔왔으며 이번 프로젝트에는 소니뮤직이 함께하게 됐다.
워너원을 배출한 '프로듀스 101'은 하반기 일본판이 시작된다. CJ ENM과 일본 최대 엔터테인먼트 기업 요시모토흥업이 공동 제작한다. 일본 오디션 프로그램 사상 역대 최대 규모로 이뤄지며 한국 방송처럼 100% '국민 프로듀서(시청자)' 투표로 데뷔할 보이그룹을 선발한다. 프로젝트 그룹 워너원은 약 1년 반 동안 활동하며 1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듀스 101'의 일본판 제작은 아이돌 시스템의 대표적 역수출 사례로 꼽힌다. '프로듀스 101'은 애초 시즌1이 시작할 당시 일본 걸그룹 AKB48을 모방했다는 논란이 일었을 정도로 유사성이 다분했다. 일본에서 자국이 원조 격인 프로그램을 수입한 데는 지난해 한일 합작으로 진행한 '프로듀스 48'의 성공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 통해 탄생한 걸그룹 아이즈원(IZ*ONE)은 일본 데뷔 싱글만 22만장 팔며 역대 K팝 걸그룹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프로듀스 101' 일본판을 통해 선발된 보이그룹은 2020년 데뷔할 예정이다.
◆ K팝 차용한 발리보의 오리콘 정복
지난달 31일 일본 오리콘 주간 앨범 랭킹 차트에서는 한 신인 보이그룹이 1위를 차지하며 화제를 모았다. 재능 있는 신인이 곧장 1위를 차지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이 팀의 정상 등극은 한일 양국 가요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주인공은 '발리스틱 보이즈(Ballistik Boyz)'다. 한국에서는 이들의 영문명을 '탄도소년단'으로 풀어 방탄소년단을 베꼈다는 지적이 일었지만 여기엔 다소 오해가 있다.
J팝 전문가인 황선업 음악평론가는 "이 팀은 발리스틱 보이즈 또는 줄여서 발리보로 자신들을 홍보했을 뿐 한번도 탄도소년단이나 BTZ라는 이름을 내세운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발리보의 인기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K팝 요소의 전반적인 차용이다. 보컬 넷에 래퍼 셋으로 이뤄진 이 팀은 기존 일본 아이돌 그룹에 비해 K팝을 연상시키는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타 J팝 팀에 비해 가창력과 안무에 무게를 더 실었다. 이는 발리보 소속사인 LDH가 주력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황 평론가는 "산다이메 제이소울 브라더스(2010년 데뷔)를 포함해 LDH 소속 보이그룹 다수에서 기존 한국 보이밴드 특장점이 관측된다"며 "걸그룹 이걸스(E-grils)에서도 K팝 걸그룹을 벤치마킹한 흔적이 보인다"고 했다.
1990년대 한국 기획사들이 전범으로 삼았던 일본 가요계에서 K팝을 벤치마킹한 보이그룹이 최정상에 오른 건 상징적이다. 일본 내 한국 아이돌 신드롬은 그만큼 뜨겁다. 지난해 11월 일본 우익에서 방탄소년단을 규탄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그달 13·14일 도쿄돔에서 열린 방탄소년단 콘서트는 만석이었다. 방탄소년단은 다음달에도 오사카, 시즈오카에서 각 2회에 달하는 스타디움 공연을 펼친다.
◆ K팝과 J팝 위상 가른 '시장 규모'
K팝 시스템이 일본으로 수출되는 건 양국 대중음악의 위상과 관련 있다. 현재 다수 한국 보이·걸그룹은 앨범을 낼 때마다 아이튠스 각국 음반 차트를 휩쓸고 있다. 반면 일본 팀은 빌보드, 아이튠스, 오피셜 차트에서 선전이 미미하다. 이 때문에 AKB48 출신 다케우치 미유가 윤종신이 대표 프로듀서로 있는 미스틱스토리와 계약을 맺고, 다카하시 주리가 울림엔터테인먼트에서 걸그룹 데뷔를 준비하는 등 J팝에서 K팝으로의 '이직'도 빈번해지는 현실이다. K팝 시스템에서 글로벌 아티스트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J팝에서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양국 대중음악 위상을 가른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내수 시장 규모가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분석이다. 자국 시장이 작은 K팝은 해외 진출이 갈급했던 반면, J팝은 내수 시장만으로도 충분한 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안주했다는 것이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 따르면 2017년 일본 음악 시장 규모는 27억2750만달러로 미국에 이어 2위다. 4억9440만달러 크기인 6위 한국 시장의 5배 이상이다. 이에 한국 기획사는 유튜브 등 무료 플랫폼을 통해 뮤직비디오와 음악이 퍼지는 것을 해외 홍보 기회로 적극 활용한 반면, 일본 엔터테인먼트는 저작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여겨 보수적으로 접근했다.
정병욱 음악평론가는 "거대한 내수 시장이 일본 아이돌 산업의 확고한 시스템을 낳았고 폭발적인 성장을 견인했지만 한편으론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는 단초가 됐다"며 "한국에서는 쏟아진 아이돌 그룹들이 지극히 한정된 자국 시장에 만족할 수 없어 해외 시장을 무대로 삼으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탄력적으로 활용한 것이 경쟁력 강화로 이어졌다"고 해석했다.
향후 J팝은 글로벌 이원화 전략을 취할 것으로 관측된다. 한편에서는 K팝을 연구하며 세계화 방안을 모색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J팝의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다.
[박창영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