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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목격자`(2018)에서 배정화는 아파트 단지 살인사건 목격자 중 한 명인 405호 여성을 열연했다. /사진제공=NEW |
두 번의 엘리베이터 신이 있다. 극 초반 소시민 가장 상훈(이성민)이 아래층 405호 여성 서연(배정화)과 처음 만나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신. 극 후반 초췌해진 서연이 살인마 태호(곽시양)가 함께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려움에 떠는 신. 두 신을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특히나 여성 관객의 입장에서, 서연의 감정에 이입되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이것은 물론 서연으로 분한 배정화(33)의 연기력 덕이다. 여성이 일상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공포를 이처럼 짧은 순간에 이토록 섬세히 표현해낸 경우는 근자에 없었다. '목격자'에서 '신 스틸러'를 한 사람 꼽아야 한다면 주저 없이 그를 택하고 싶은 이유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초가을 한낮, 서울 중구 남산한옥마을에서 배우 배정화를 만났다. 힘 없고 음울했던 민낯의 서연은 온데 간데 없었다. 마른 장신을 부드럽게 감싼 유채꽃 색감의 원피스, 길게 늘어뜨린 연갈색 머리, 오른쪽 귀 아래 수줍은 듯 매달린 은빛 귀걸이. 너무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은은한 메이크업. 배정화는 "꾸미면 대부분 못 알아보더라"며 환하게 웃음 지었다.
"서연을 연기한 것만으로도 제겐 정말 행운 같은 일이었어요. 그런데 많이 봐주시기까지 했으니 정말 꿈만 같네요.(웃음)" '목격자'의 개봉 4주차 누적 관객수는 246만 5226명(4일 영화진흥위원회 집계). 손익분기점 180만명은 이미 넘긴 지 오래다. 배정화의 출연작을 통틀어 가장 많은 관객이 봐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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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충우 기자 |
-'목격자'를 보며 흥미로웠던 점 하나는 엘리베이터라는 공간의 활용이었어요. 한국 여성이 겪는 일상적 공포를 잘 재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만큼 배우님의 연기가 빛을 발해서이기도 할 테고요.
▷남자분들은 잘 모르실 걸요. 여성들이 느끼는 그런 두려움들에 대해서요. 저는 강남에서 오랜 기간 혼자 살다 보니 수연이 마주하는 상황에 굉장히 공감이 갔어요. 지금도 해가 진 밤에 혼자 바깥을 거닐면 사주 경계를 해요. 어디서 어떤 일이 닥쳐올 지 모르니까요. 낯선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특히 더 긴장하게 되고요.
배정화는 촬영 전 강남의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들을 몇 주간 홀로 누볐다고 했다. 환한 대낮이든 캄캄한 밤중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제가 아파트에 살아보질 않았거든요. 공간부터 이해해야 연기할 수 있겠더라고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서연이 느꼈을 감정들에 깊이 들어가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빌라에 살고 있기에 아파트 단지에 무지하기도 했고요. 낮이든 밤이든 혼자서 천천히 걸었어요. 그런데 밤이 되니 훨씬 더 무서워지는 거예요. 밤 10~11시에 나무가 우거져 있는 단지들은 특히나요. 나무 사이로 뭔가 잘 보이지도 않고 가로등이 있어도 주변은 캄캄하고요. 주차장은 더더욱 무서웠어요. 그런 경험을 해보면서 아, 정말 누가 따라와 나쁜 짓을 해도 아무도 몰라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분량이 많진 않으셔서 그 정도로 준비하시리란 짐작까진 못했네요.
▷자칫하면 쓱 넘어갈 수 있는 신들일 수 있을 거에요. 그런데요. 그래서 더 디테일하게 정확하게 해야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극중에 서연과 상훈이 새벽녘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나잖아요. 대본을 읽으면서 궁금해지더라고요. 이 여자는 왜 이 시간에 혼자 외출을 했던 걸까. 밤 12시만 넘으면 나는 편의점도 안 가는데 이 여자는 왜 장을 본 걸까. 남편과 주말 부부였으니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던 걸까, 하고 상상했죠. 서연이 살아가는 환경, 극중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까지 납득할 수 있어야 제가 서연이 될 수 있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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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충우 기자 |
▷주어진 신이 적으면, 그 적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자신을 놓게 되고 스스로한테 안일해지기 쉬워요. 그런 건 경계해야죠. 제 연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신은 엘리베이터 신 두 개 뿐이니 한 신이 나와도 서연이란 여자를 정말 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 이 여자가 여태껏 어떻게 살아왔을까, 말은 왜 이렇게 할까, 행동은 왜 저럴까 등등 이해 가능해질 때까지 고민해볼 수밖에요.
-그래서 서연이라는 여자는 어떻게 해석하셨나요?
▷지극히 평범한 우리 일상의 여자로 봤어요. 우리 주변에 볼 수 있는 아파트 405호 여자.
-서연은 극중에 그나마 가장 양심적이에요. 주인공 상훈마저 두려움에 자신이 목격자임을 부인하려 들잖아요. 주민들은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경찰 수사에 협조하지도 않고요. 반면 서연은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결국엔 상훈의 집을 찾아가 절박하게 문을 두드려요. 경찰에게 지금이라도 어서 신고하자고. 관찰자의 입장에선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대단한 결단이 있지 않고서야 하기 힘든 행동이죠.
▷제가 빌라 2층에 살아요. 혼자 지내니 바깥이 소란스러우면 블라인드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슬쩍 내다보곤 해요. 이 작품 때문이 아니라도 평소에 생각하는 게 있는데요. 어떤 급박한 상황이 닥쳐서 신고하는 것 말고도 작은 도움을 주는 일 조차 쉽지 않다는 거예요. '내가 아니면 다른 이들이 도와주겠지' '굳이 내가 왜?' 하며 멈칫하게 돼죠. 그 '멈칫'하는 순간 때문에 우리가 남한테 도움을 못 주는 거 아닌가.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면 즉각 움직여야 한다. 서연은 처음엔 '멈칫' 했지만 결국엔 움직이기로 마음을 굳히고 실천했으니 용감한 여자죠.
-이성민 배우와의 호흡은 어떠셨나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신이 첫 호흡이셨을 텐데.
▷얼마큼 경계를 하다 어디 쯤에서 얼마나 경계를 푸는지 그 미세한 결을 잘 표현해내야 했어요. 처음 엘리베이터를 같이 탈 때 약간 불안해 하잖아요. 그 불안을 덜어내는 과정을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어느 정도로 자연스럽게 풀 지가 관건이었어요.
-그래서 그리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었던 거군요.
▷제가 10여년을 알고 지낸 이웃이라도 서연처럼 새벽녘 엘리베이터에서 갑자기 마주치면 쉽게 경계가 풀어지진 않을 것 같아요.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조금이라도 웃으면 안 된다. 민망해서라도 아 예, 하며 웃지 말아달라고요. 실감을 위해 디테일을 살려달라는 주문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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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충우 기자 |
너무나 당연해서 상투적으로 다가오는 말들이 있다. '한 인물을 연기하려면 그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 또한 그렇다. 하지만 그런 말들일 수록 정작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당연함의 역설이랄까. 하지만 배정화는 이 역설을 극복해내는 것 같다. 제 몸이 아파오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서연으로 수개월 살아가는 일이란 어떤 경험이었냐"고 물으니 그는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5키로 넘게 살이 쑥 빠지더라고요."
-일부러 감량한 건가요?
▷아니요, 준비한 게 아닌데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촬영날까지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음식도 잘 못 먹겠고 소화도 잘 안 되고. 정말 서연이 된 것처럼요. 촬영 당일에는 더 힘들었어요. 그 전에 이틀간 잠을 못잤거든요. 근데 저는요. 가짜 같이 '척'하는 건 너무 싫어요. 그런 건 너무 오글거리고 부끄러워요.
-모종의 강박이랄까, 완벽주의 같으신데요.
▷관객 입장에서는 결과만 보일 것 아니예요. 여러모로 스스로에게 엄격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특히나 영화 같은 매체는 평생 남잖아요. 제가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 너무 춥고 몸이 힘들어 감독님한테 한번만 더 할게요, 라는 말을 미처 못 했었어요. 오케이 하셨으니 괜찮겠지 하면서. 그런데 후에 제 연기를 다시 보면 미치도록 후회가 되는 거예요. 제 자신한테 납득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마음을 달리 먹기 시작했어요. 다시 한 번 찍자고 하지 못할 거면 한 컷 한 컷 찍을 때 제대로 준비해서 제대로 마음먹고 제대로 해내자고요.
이 같은 엄정함은 그의 성장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배정화는 1985년 1월 14일 부산 광안리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부터 유달리 독립심이 강한 소녀였다. 학업에 대한 강요는 없었기에 자유롭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럴 때면 주로 소설책을 봤다. "로맨스 소설이라는 소설은 습관처럼 사서 읽었어요. 자기 전엔 항상 그날 읽은 소설 속 주인공이 돼보는 상상을 했죠."
부산을 떠난 건 고교 2학년 무렵. 인천으로 대학을 간 언니 따라 전학을 갔다. 처음엔 반대하던 부모님도 독립심 강한 딸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1년 간 언니와 자취를 했고, 1년 후엔 홀로 서울로 떠난다. 진정한 홀로서기의 시작. 배정화는 "큰 물에서 놀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 서울에 대한 진한 동경심이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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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충우 기자 |
-딸인데 부모님이 걱정 많으셨겠는데요.
▷부모님이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제주도로 간다고 즐겨 말하셨어요.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서울로 갈거야라고 우기곤 했죠. 그러니 부모님도 반대하시다 결국엔 허락해주셨고요. 무서울 게 없었어요. 어떻게든 부딪쳐보면 되지 하는 오기 같은 게 있었달까요. 언니는 공부해야 하니 학교 가고 저는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고 친척도 없으니 혼자 빨래하고 책 보고 서빙 아르바이트 일 하고 그랬어요.
-어떤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당시엔 막연하게 올라간 거예요. 그러다 2학년 때 길거리 캐스팅을 받고 잡지 모델일을 잠시 하는데요. 그걸 계기로 연기까지 준비하게 돼요. 1년 후에 소속사 분이 연기 준비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시더라고요. 그 뒤로 연기학원을 다녔죠.
-그러고 보면 길거리 캐스팅 많이 받으셨겠어요.
▷(웃으며) 예뻤으니까요. 당시엔 제가 젤 예쁜 줄 알았어요.
-지금은요?
▷제 모습에 만족해요. 그런데 예쁜 건 이젠 잘 모르겠네요. 요즘은 예쁜 분들이 참 많잖아요.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한 번에 붙으셨던데.
▷2학년 때 해본 잡지 모델일이 참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광안리 시골에서 살던 아이인데 제 사진이 잡지에 실리고 하니까요. 그러다 고3 때 연기를 배우면서 방향을 잡은 거죠. 대학은 가야겠고 연기를 배우고 있으니 연극영화과 진학을 준비하자. 근데 말이 쉽지 엄청 힘들었어요.
-쉽게 쉽게 하신 느낌인데.
▷(길게 한숨쉬며) 다시 그렇게 살아보라 하면 절대 못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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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이충우 기자 |
과장이 아니다. 고3 전학생 배정화는 예체능계 전교 1등이었다. 예체능 분야로만 치면 전과목 1등급은 물론 전국 모의고사마저 부동의 1등. 어느 모로 보나 부족할 것 없는 팔방미인. "수능일까지 하루 네 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울면서 이 악물고 했어요. 연극영화과에 진학 가능한 학교가 동국대, 중앙대, 서울예전만 있는 줄 알았어요. 한예종의 존재는 당시엔 몰랐고요. 셋 중 동대만 유일하게 서울 복판에 있으니 여길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런데 입시 요강을 뜯어보니 내신도 잘해야 해, 수능도 잘 봐야해, 실기도 잘해야 해. 휴, 잠잘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대단하네요….
▷동대 떨어지면 다른 덴 안 간다는 각오였어요. (대입) 원서 접수도 제가 학교에서 두 번째로 냈죠. 새벽에 일어나 불공 드리러 가는 심정으로 가서 냈는데, 근데 당시 신분증을 자췻방에 놓고 출발했어요. 안 그랬다면 제일 먼저 냈을 텐데요.(웃음) 아무튼 합격 소식 듣고나선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어요. 기쁘다기보단 눈물부터 주룩 주룩 흐르더라고요.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그 모든 걸 자기 의지로 해냈다는 게 참 놀랍네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겼어요. 안 그러면 내가 뭐가 되겠나 싶어서요. 부모님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학원은 어디 다녀라 그러신 적이 없어요. 시험 성적을 잘 받아와도 부모님한테 자랑하듯 보여드린 적도 거의 없고요. 어떤 일이든 제가 알아서 하자는 주의였어요.
-부산에는 자주 내려가는 편이었나요?
▷당시엔 아예 안 내려갔어요. 연기를 하려면 사투리부터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왜인지 다녀오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달까요. 여자인지라 빨리 고친 편인데 네이티브까진 금방 안 되더라고요. 20대 후반은 돼서야 그 뉘앙스가 거의 사라진 것 같아요.
-부모님께선 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내심 섭섭함이나 걱정도 없지 않으셨겠어요.
▷늘 걱정하셨죠. 궁금해도 어떻게 사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동국대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한다. 하지만 한학기만 다니곤 이내 휴학했다. 바라던 대학은 왔지만, 정작 배우라는 길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질 않아서였다. 시일이 흐를 수록 공허해졌다. 배정화는 "서빙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모처럼 잉여로운 시간이었어요. 고민해볼 시간은 충분했죠.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타, 연예인이 아닌 진짜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러곤 반년 만에 학교로 돌아온다.
-남자들은 강제로 군대라도 가야 그럴 시간이라도 갖는데 말이죠.
▷(웃으며) 혼자 생각해서 혼자 결정하는 스타일이다보니 앞길에 대해서도 혼자 힘으로 선택해야겠더라고요. 휴학 기간에 쭉 생각의 시간을 가져보니 "제대로 연기 잘하는 배우이고 싶다"는 꿈이 점점 더 간절해진 거예요. 그 뒤로 다시 열심히 학교에 나갔죠. 연극과니 수업 듣고 방학 내내 연습하고 무대에 오르면서요.
-출발은 연극이었군요.
▷저희 때는 연극학과 영화학과가 분리돼 있었어요. 2011년 첫 장편 영화를 찍기 전까지 카메라 연기는 전혀 해보질 못했어요.
-무대 위는 어떻던가요, 즐거웠나요.
▷(고게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요, 극단도 안 들어갔어요(그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일이 많았어요.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요. 처음 대학로에서 오른 공연부터 삐걱댔어요. 제작자가 돈을 떼먹고 주지 않더라고요. 당시 막내 배우가 돈 달라고 하니 제작자는 오히려 예의없게 군다고 버럭 화를 내더라고요.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보니 연극을 멀리하게 된 것 같아요. 2005년에 졸업하고 2011년까지 10여편을 했으니 6년 정도 세월이죠. 좋은 기억이 별로 없어요. 경제적 보상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적었어요. 속상했어요.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이게 배우의 숙명일까. 내가 세상에 의미있는 사람인걸까 하며 회의감이 밀려왔어요. 그러다 중간에 대학원을 잠시 다녔고 6~7개월 배낭여행을 떠났죠.
불현듯 떠오르는 영화 장면이 있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 중후반부. 때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어스름녘이고, 해미(전종서)는 한 마리 나비처럼 너울 너울 춤을 추고 있다. 외화면으론 마일스 데이비스의 'Lift to the Scaffold'이 울려퍼지고, 해미의 춤사위는 점점 더 처연함을 더해간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그레이트 헝거의 간절한 몸짓. 너무나 아름다우나 저러다 붉은 노을과 함께 홀연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의 몸짓.
배정화의 고백을 가만히 곱씹다 해미를 떠올린 건, 그의 20대 또한 그레이트 헝거의 그것에 다르지 않아 보여서였다. 다른 점이라면 해미는 떠나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는 돌아왔다는 것. 스물 일곱 나이에 배낭여행을 떠난 배정화는 7개월 만에 원래의 자리로 온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오른 새 연극이 '오월엔 결혼할거야'(10년 간 함께부은 적금을 제일 먼저 결혼한 친구에게 몰아주기로 한 29세 세 여성의 좌충우돌 이야기다.). 이 작품으로 그는 생애 첫 영화 '콘돌은 날아간다'(2013)까지 캐스팅된다.
-전수일 감독의 '콘돌은 날아간다'는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공식 초청작이었어요. 사제와 죽은 여중생 언니의 이야기를 그린 다소 어두운 정조의 영화였죠. 소재가 자극적이어서 질타도 많이 받았었고.
▷전 감독님 전작을 인상깊게 봤었어요. 이 영화도 시놉시스가 흥미로웠고 영화 출연을 오래 바라왔던 지라 고민할 게 없었죠. 근데 처음엔 인지도 있는 여배우가 필요했다고 해요. 그 때문인지 오디션에선 떨어졌고요. 하지만 뭐랄까요. 막연히 다시 연락이 올 것 같았달까요. 정말로 몇 주 뒤에 감독님한테 캐스팅됐다고 연락이 오더라고요.
-부모도 없는 죽은 여동생의 언니이므로 감정적으로도 진폭이 굉장히 큰 캐릭터였어요. 게다가 전라의 베드신까지 나오죠. 신인 여배우가 감당하기엔 벅찼을 것 같은데.
▷도전하고 싶었어요. 내가 언제 이런 극한의 감정, 밑바닥 감정을 느껴볼 수 있을까 싶었어요. 이 작품을 부산에서 찍었는데요. 몇 달간 부산에서 오로지 그 인물이 되어 그 인물의 고립된 감정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려고 했어요. 노출신 같은 경우엔 감독님과 작품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아, 저걸 내가 어떻게 했지, 저게 나인가 싶은 생각이 들때가 있어요.
-이듬해 성지혜 감독의 '미국인 친구'(2014)도 전주국제영화제에 갔죠. 자신이 쓰려던 소설에 도움을 줄 그림을 찾고 있던 지윤이라는 여자가 있고, 그림의 소유자이자 미국 정보원인 재미동포 피터라는 남자가 있죠. 배우님이 연기한 혜진이 그 둘을 이어주며 긴장감을 구축해주고요. 세 번째 영화인 전재홍 감독의 '살인재능'(2015)도 부국제 초청작이었는데, 이 또한 범상치 않아요. 한 남자가 살인에 대한 쾌락에 점점 중독되며 악마가 돼요. 그 욕망은 배우님이 분한 여자친구 수진에게도 전이되고요. 연달아 괴이한 캐릭터들만 연기하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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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살인재능`에서 배우 배정화는 연인의 살인 재능을 일깨우고 악행을 부추기는 여자 수진을 호연했다. /사진제공=인디스토리 |
▷돌이켜보면 첫 작품부터 몹시 힘들었어요. 감정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잖아요. 더욱이 주연이었고요. 그래서 다음 작품 찍을 땐 '이것보단 덜 힘들겠지'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요. 두 번째는 더 힘들더라고요. 카메라 연기에 내가 더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면 할 수록 어렵고 불만족스러웠어요. 결국엔 '미국인 친구' 마지막 촬영 때 제가 성 감독님께 손 편지를 썼죠. "죄송해요, 감독님 작품에 누가 되면 안 되는데, 더 잘 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쉽기만 해요"라고요. 감독님이 그걸 현장에서 바로 읽으시더라고요. 그러다 눈물 흘리시면서 그러셨어요. "아니에요, 내가 감독인데 더 잘 이끌어주고 더 잘해주었어야 했는데, 내가 부족한 것 같아요. 미안해요." 그러고 보면 고마운 분들은 늘 계셨던 것 같아요. '살인재능'의 수진은 일반인들이 보았을 땐 악역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남자를 부추겨서 악행을 저지르게 하니까요. 그런데요. 저는 그걸 나쁜 역할이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21세기를 살아가는 평범한 여자. 악인 선인 구분 짓지 않고 그 여자를 보려고 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그 여자가 되지 못한 채 거짓으로 연기하게 될 것 같았거든요.
-첫 상업영화 출연작이 '위대한 소원'(2016)이셨죠. 흥행엔 실패한 영화지만 전 별생각 없이 재밌게 본 걸로 기억해요. 주인공 고환이한테 첫 동정을 선사하는 콜걸녀로 나오셨는데.
▷코믹물인데 코믹한 역할은 아니었죠.(웃음) 고환이의 '위대한 소원'을 이뤄주는 여자였으니까요. 촬영 막바지에 뒤늦게 캐스팅됐는데요. 편집된 장면이 좀 있어요. 원래는 고환이와 거사를 치르는 장면, 서로 쳐다보며 대화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둘 사이에 교감하는 부분이 빠진 건 조금 아쉽기는 했어요. 막바지에 투입돼 현장에 오래 있지 못했기도 했고요. 그래도 며칠 바짝 긴장하고 준비해서인지 NG 없이 금방 끝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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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믹 영화 `위대한 소원`(2016)에서 콜걸녀를 연기한 배우 배정화. /사진제공=NEW |
2016년은 배정화의 존재를 안방극장으로까지 넓힌 해다. '기적의 시간 로스타임' '사랑이 오네요'에 이어 2017년 '보이스' '내 남자의 비밀' '블랙' 등에 연이어 출연한다. 그중 '보이스'에서 서늘한 표정이 압권인 아동학대범은 그를 일약 주목받게 해준 드라마다. 오디션 합격 후 매일 같이 도서관을 오갔다고 한다. 범죄자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촬영 두 달 전부터 심리학자와 프로파일러가 쓴 도서는 최대한 찾아 읽었어요. 범죄자가 어떤 심리를 갖고 있는 지부터 이해해야 하니까요."
부지런함도 이런 부지런함은 드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란, 적어도 누군가에겐 그만큼 스스로에게 정직하겠다는 다짐과도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같은 강박관념이라면 굳이 나쁠 것도 없지 않을까. 배정화는 "언제쯤 나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도리질을 했다. "아직 내 자신을 배우라고 부르긴 부끄럽다"면서.
"아마도 대부분의 배우들이 품고 있는 고민 아닐까요? 제자리에 멈춰서 있고 싶진 않을 테니까요. 저는 말이죠. 정말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민하려고요. 그렇게 저만의 길을 다져나가려고요."
안주하지 않는 삶은 그만큼 나아가는 법이다. 배정화의 삶 역시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김시균 문화부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