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양혜규는 "전시하면서 부딪히는 만큼 배우고 성장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승환 기자] |
최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작가는 "식상한 답변을 하면 옐로우 카드(경고)를 달라"고 농담을 건네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지루함을 못견디는 작가의 작업 역시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지난해 9월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볼프강 한 미술상'을 안겨준 독일 근대미술협회(GMKM)는 그를 "독특한 사상가"라고 칭하며 "작업은 퍼포먼스 요소로 가득 차 있으며 정지상태인 것은 없다"고 평가했다.
이 수상과 연계해 올해 독일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도착 예정 시간(ETA) 1994-2018'도 화제였다. 지난 4월 18일 개막부터 8월 12일 폐막까지 관객 6만5742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1994년 데뷔 이후 24년 작업 세계를 아우르는 대형 설치작품과 사진, 종이 작업, 비디오 에세이, 의인화된 조각 등 120여점을 펼친 전시였다. 그 중에 2008년 붉은색 대형 블라인드 설치 작품 '조우의 산맥'은 루트비히 미술관에 소장됐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이 구조적으로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음은 작가와 나눈 일문일답.
▶독일 작가가 아닌 이방인이라서 내 작품을 어떻게 볼지 걱정했지만 텃세는 없었다. 다행히 2008년부터 다른 전시로 특별한 인연을 맺어온 루트비히 미술관장이자 큐레이터인 일마즈 지비오르와 잘 맞았다. 전시장과 내 작품의 다양한 성격도 조화를 이룬 것 같다. 전시 사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상당히 회자됐고, 진지한 감상평을 긴 이메일로 보내준 지인들도 많았다.
-이번 회고전을 통해 새삼 깨달은게 있다면.
▶회고전(survey exhibition)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예를 들어 어느 시기에 작업이 많았는지 도표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객관화시키는 작업이 가능해졌다. 앞으로 뭘 할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는 계기였다. 모든 일을 할 때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총 415페이지에 작품 1444점을 실은 전작 도록도 발간했는데.
▶시기별로 나의 모든 걸 보여주는 도록이니 연구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징글징글할 정도로 작업량이 많았다. 그래도 작가로서 근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됐다. 2001년부터 최근까지 큐레이터, 학예사, 평론가, 학자 등이 내 작품에 대해 쓴 에세이 20편을 골라 2020년 즈음에 국내에서 일종의 선집으로 출판하고 싶다.
-다음 회고전에는 무엇을 더 보완하거나 강조하고 싶나.
▶팔팔한 생존 작가는 회고전을 금기시한다. 왠지 작업 생명이 끊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알게 되는 발판으로 삼았고, 한 번 해보니까 재미있더라. 물론 작업량이 많아 고생스럽지만, 이번 노하우를 발휘해 다른 버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미술관의 성격과 위치 그리고 회고전을 기획하는 큐레이터와 잘 맞지 않으면 안 하는 게 낫다. 전시가 연애라면 회고전은 결혼 같다. 일가친지와 주변의 지인으로부터 환영받으면서 지원받을 수 있어야 진정으로 의미 있다고 본다.
-이번 전시 계기가 된 볼프강 한 미술상은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준 상이었나.
▶지난 몇 년 간 이 상의 후보로 계속 올랐었다. 독일 미술관에서 주는 국제적인 상이기 때문에 원로 작가가 수상하는 게 일반적이라 기대를 안 했다. 수상자의 대표작이 미술관에 소장돼 100년 이상 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 점이 작가에게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사석에서 만난 독일 지인들이 이 상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알아줬으면 하더라. 그만큼 독일 사람들은 이 상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내가 토박이는 아니지만 독일어를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살갑게 느끼더라.
-영국 리버풀 비엔날레(7월 14~10월 28일)에서 2015년 시작한 '중간 유형' 연작을 새롭게 구성한 설치작품을 선보인 이유는.
▶산업 혁명 전후로 엄청난 부를 쌓은 선박 항만 도시 리버풀에도 이교도적인 무속 전통이 남아있다. 그 중 봄 맞이 의례인 메이 폴 댄스(May pole dance)는 리본 색, 앞치마 같은 의상이나 오브제가 지역마다 다를지언정 유럽 곳곳에 존재한다. 보편성과 특수성, 독창성이 공존하는 것이다. 리버풀 주변 지역의 근대 산업사와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진 이교도적인 무속 전통에 흥미를 느꼈다. 일정상 신작을 할 수 없어 리버풀 비엔날레와 협의를 거듭한 끝에 기존 '중간 유형' 조각을 선보이는 대신 공간이나 환경을 새롭게 디자인하기로 했다. 벽지 작업은 현지 디자이너 마이크 카니와 협업해 리버풀의 근대와 고대를 연구한 끝에 탄생했다.
↑ 독일 루트비히 미술관에 설치된 대형 블라인드 작품 `조우의 산맥`(왼쪽)과 `솔 르윗 뒤집기-1078배로 확장, 복제하여 다시 돌려놓은 K123456`. [사진제공 = 국제갤러리] |
▶밀라노 패션 브랜드 풀라(Furla)가 국공립 미술관을 돕는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내가 두 번째 작가로 선정됐다. 이번 개인전은 총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직사각형의 공간에 들어서면 미니멀한 실 작업과 거울 작업이 일종의 도입부를 구성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공간에 블라인드 설치작인 '성채'(2011년)가 전시된다. 마지막 공간에는 '의상 동차(動車)' 시리즈 신작이 동적인 방을 구성하게 된다. 오프닝에는 윤이상 음악을 연주할 계획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전시할 때 무엇이 가장 고민되나.
▶미술관과 갤러리, 비엔날레가 위치한 도시와 사회적 문맥을 이해하고 너무 황당하지 않은 전시를 만들어야 한다. 어디서든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설명이 되는 전시를 하고 싶다. 양혜규는 다작과 활발한 전시활동으로 알려진 작가가 맞다. 대신 전시 외에는 딴 일은 별로 없다. 공공미술도 지양하는 편이고, 집안도 안녕하시다. 돌아보면 다작하는 만큼 성장했다. 전시 안 하고 어떻게 성장하는지 모르겠다. 전시하면서 부딪히는 만큼 배우고 성장해서 여기까지 왔다.
-지난해부터 모교인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립미술학교 슈테델슐레 교수로 재직 중인데 작가 활동에 지장은 없나.
▶교수직은 작가 지망생의 고민과 성장에 귀 기울여 주는 역할인데, 그게 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소소한 이야기라도 진지하게 듣고 마음을 싣는 연습을 한다. 조르지아, 베트남, 중국, 콜롬비아, 미국, 이란, 스위스, 영국 등 여러 나라 학생들이 섞여있다. 나는 그들에 대한 내 욕심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편이고, 그러다 보니 실망이 섞인 짜증을 종종 낸다. 우리 학교는 교수가 수업 날짜를 정할 수 있어 3주에 3일씩 한 학기에 25일 정도 교직에 할애한다. 내가 의욕이 많아져서 지금보다 학교에 더 자주 가게 되면 학생들이 말라죽을 것이다. (웃음)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그의 세계 전시는 쉼표가 없다. 트리엔날레 디 밀라노 개인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몽펠리에 현대미술관 개인전(10월 13일~내년 1월 13일),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 개인전(11월 16일~내년 4월 14일) 등이 열린다. 내년에는 미국 마이애미 비치에 위치한 더 배스(The Bass) 미술관 개인전, 2020년에는 캐나다 아트 갤러리 오브 온타리오 개인전 등이 예정돼 있다.
■ She is…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양혜규 작가는 1994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1994년 독일 슈테델슐레로 유학을 떠나 게오르크 헤롤트 교수를 사사했다. 1999년 졸업 후 독창적인 설치 작품으로 세계 미술계 주목을 받기 시작
[전지현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