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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8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만난 김창열 화백에게 인생 철학을 묻자 "물방울처럼 살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살자"라고 말했다. 왜 수염을 기르냐는 질문에는 "다른 사람은 안하니까"라고 답했다. [김재훈 기자] |
지난 28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만난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88)은 "구순을 앞두고 내가 죽을 뻔 했지, 죽음에 가까우면 별의별 게 다 일어나는구나"라고 말했다.
그가 요즘들어 자주 입에 올리는 죽음의 의미를 물었다 "그냥 없는 걸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물방울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물방울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고."
왜 45년 넘게 천착해온 물방울을 '무(無)'로 규정할까. 그림을 그릴 때도 무념무상(無念無想)이라고.
그의 작업실에 있는 무수한 물방울에 정말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을까. 재차 묻는 기자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여자"라고 답하며 빙그레 웃었다. 귀가 번쩍 띄였다. 그러나 노화백은 "여자는 무슨, 여자는 그림자도 안보여, 아무 것도 아닌게 된 거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긴 세월 물방울을 그리면서 얻은 깨달음은 무엇일까. "깨달음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달마(중국 선종 창시자)처럼 번쩍하게 찰나가 내게 오지 않고, 마누라에게 고함 지르는 속물로서 인간을 벗어나지는 못했는데. 미안하지만 그래요."
그림은 고독한 작업이다. 텅 빈 캠퍼스 앞에 앉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달마는 9년 동안 면벽수행을 했어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득도의 경지에 오른 듯한 노화백의 물방울은 1972년 파리 인근 팔레조 마굿간에서 탄생했다. 유화 색채를 떼어내 재활용하려고 캔버스에 물을 뿌렸는데 아침 햇살에 빛나는 물방울을 발견했다.
"밥 해먹을 쌀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신혼이었죠. 마굿간에 화장실도 없어 옆집에서 물을 길어다 캔버스(직물로 만든 화폭)에 뿌렸어요. 뒷면 솜털에 물방울이 일정하게 맺힌게 아니라 컸다, 작았다, 그게 아주 찬란하다 생각했어. 이게 그림이 되겠구나, 어떻게 하면 시대가 요구하는 그림의 요건을 갖출까 평생 연구한 셈이에요."
영롱한 물방울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세상을 투영하는 듯한 오묘한 물방울 그림으로 세계인을 홀렸다. 서양 유화 기법에 소멸 직전의 아름다움을 담은 동양적 화풍으로 호평을 얻었으며 수억원대에 팔린다. 2004년에는 프랑스 국립 쥬드폼미술관에서 그의 화업을 조명하는 초대전을 열어 세계 미술계에서 위상을 높였다.
지난 23일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받은 노화백의 수상수감은 이렇다. "나폴레옹이 만든 상인데 지령을 받은 사람이 '어린애 장난 같은 짓을 왜 하냐'고 묻자 나폴레옹이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장난 같은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지요.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상이지."
40년 넘게 살았던 파리가 그립지 않을까. 그 곳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프랑스인 아내 마르틴느 질롱을 만났고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단색화 대가 이우환, 박서보 등과 교유하며 한국 미술사를 새로 써내려갔다.
"특별히 그 시절이 그리울 것은 없고, 이 것 저 것 생각날 때가 있기는 하죠. 친구가 죽었다거나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늘도 50년 지기가 졸도해 깨어나지 못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사람 좋아하고 거절을 잘 못하는 그는 파리 자택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양고기를 대접하길 즐겼다. 직접 오븐에 구운 양고기를 손수 잘라줘 지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한국인은 누구나 해외 가면 고생하죠.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줘야 해요. 영어도 독일어도 불어도 못하는 한국 사람이 파리에 딱 떨어지면 얼마나 막막하겠어요. 이 사람 저사람이 찾아오는데 안 도와주면 도둑놈이지."
든든하게 화단을 지켜온 그는 지난 8월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좀 늦었지만 수상 소감을 묻자 긴 답변이 이어졌다. "호랑이가 출몰하는 산골짜기(평남 맹산)에서 태어났는데 다행히 잡아먹히지 않았어요. 8·15 해방 후 야밤에 단신으로 38선을 넘는데 소련 병정들이 따발총을 쏘아댔지요. 서울대 3학년 때 전쟁이 터졌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지나다니면서 '나는 왜 안 죽었을까' 생각해봤죠. 그 이유를 나는 지금도 모릅니다. 1965년에는 단돈 4달러를 들고 뉴욕 케네디공항에 도착했고, 1969년 파리로 가서 밥을 굶으며 그림을 그렸어요.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이효석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주인공 장돌뱅이 허생원처럼 평생 세상을 떠돌며 살았지요."
돌이켜보면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13세에는 불심검문에 걸려 평양소년부에 반공주의자로 수감됐으며, 전쟁 후에는 경찰전문학교 도서관장으로 일했다. "책을 내 맘 대로 살 수 있어 좋았어요. 사르트르와 까뮈 책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인데 다 읽었어요. 평생 처음으로 공부했지. (월급을 받으니) 친구들 만나면 술 한 잔 씩 사고, 그 때 이어령도 만났지."
그의 평생 역작 220점을 수장한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 1주년을 맞아 '김창열과 그의 친구들 7080'(내년 1월 31일까지) 전시를 열고 있다. 1970~80년대 백남준,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 작품들과 그의 물방울 그림을 걸었다. 제주도는 그가 전쟁을 피해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그 시절 무엇이 가장 기억날까.
"비가 올 때 화장실에 가면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내 똥물도 떨어지고. 그런데 그 밑에 돼지가 와서 떨어지는 것을 받아먹고는 후다닥 나가. 친할 뻔 했던 여자도 있는데 이름도 성도 몰라."
제주 미술관 옆에 짓고 있는 자택이 지난 주말 완공됐다. 앞으로 거기서 살게 될까. "식구들과 상의해봐야 해요. 막내 손자(10세)가 있는데 그 녀석이 굉장히 나를 따르지. 나도 그놈이 없으면 섭섭해. 손자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데 나보다 더 잘 그려."
여생에 더 이루고 싶은게 있을까. "그림을 좀 더 그리고 싶어요. 이런 그림, 저런 그림. 최근에 엥포르멜 시대 그림이 재평가받고 있다는데, 물방울 이전 초기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어요."
그는 1960년대 앵포르멜 운동 선구자였다. 기성 화단에 반발하며 등장한 뜨거운 추상이다. 당시 그의 그림에선 거친 마티에르가 인상적이다.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깊은 상처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이 세상의 희로애락을 물방울로 정화해온 노화백이 꼭 남기고 싶은 것은 뭘까. "최근에 자꾸 우리 손
그의 생애를 바꾼 사람으로는 유년시절 예배당 앞에서 배나무를 똑같이 그리던 노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을 허락해준 어머니를 꼽았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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