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리 |
2008년 5월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 김규리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광우병에 감염된 소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먹는 게 낫겠다"는 글을 올렸고, 당시 이 문장은 '청산가리'라는 표현의 강렬함 때문에 급속도로 확산됐다.
수십 만명의 시민들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세종로에 차벽이 설치되는 첨예한 긴장의 시대에 그는 이 한 마디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김미화, 김제동, 윤도현 등 당시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들 속에서 김규리는 그전까지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컸다.
당시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김민선의 청산가리 발언'이 소고기 소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묻는 질문에 15.8%가 "그렇다"고 답했을 만큼 그의 발언은 파장이 상당했다(리얼미터 2009년 8월 12일 조사). 네티즌들로부터는 '개념배우'란 별명을 얻었지만 미국산 소고기 수입업자들은 그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다(2010년 2월 1심 판결에서 김규리가 승소했고, 이후 2심 진행 중 원고가 소송을 취하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바꾼 건 2009년말이다. 당시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는 개명 사유를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불려온 이름으로 바꾸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1999년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10년간 구축해온 커리어가 무너질 위험을 감수할 만큼 그에게 '청산가리 사건'은 빠져나오고 싶은 부담이었다.
↑ 김규리 |
그가 독해졌다는 것을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는 MBC의 연예인 댄스스포츠 경연 프로그램 '댄싱 위드 더 스타'였다. 그는 생전 처음 해보는 댄스스포츠를 다리에 멍이 들 정도로 연습했다. 본인 표현에 의하면 "정말 미친 듯이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 프로그램의 최대 수혜자로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그전까지 자신이 개명했다는 사실을 인터뷰가 끝날 때마다 이야기하고 다니던 그는 이 프로그램 이후로는 더 이상 그런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후 큰 작품, 작은 작품 가리지 않고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배우 인생 2막을 살고 있다. 정치적 소신을 드러내는 영화('또 하나의 약속')에 출연하기도 하고, 아프리카 오지 봉사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한다.
↑ '풍산개'의 김규리 |
김규리는 블랙리스트의 희생자이지만 이후 그의 커리어는 이름까지 바꾼 그가 신인의 자세로 다시 시작해 오롯이 그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기에 놀랍다. 개명하던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민선이란 인물이 인생
그는 그의 말대로 했다. 그의 30대는 단지 "훌쩍 가버린" 것이 아니다.
[양유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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