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사랑이 왜 위대한데. 퍼주고 퍼줘도 아까울 게 없거든. 죽음이 코 앞에 있는데 아까울게 뭐 있겠냐. 헌데 이십대 땐 그게 되냐? 재고 또 재고, 줄까 말까 손핼까 아닐까, 계산 속이 복잡하잖아. 그건 엄밀히 말하면 사랑이 아니지. 비즈니스지."
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고들 한다. 나쁜 이야기만은 아닌 듯 하다. 그만큼 다시 순수해진다는 의미 아닐까. 작품 속 자룡의 대사처럼 재거나 계산하지 않는 그런 아낌없는 사랑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노년인가 보다. 심리학자 메리 파이퍼도 "젊은 사랑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노년의 사랑은 누군가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랑이다"고 정의한다.
연극 '언덕을 넘어서 가자'는 황혼에 접어든 국민학교 동창 세 사람이 주인공이다. 50년이 지나서야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세 남녀의 좌충우돌 삼각관계를 다룬다.
극작가 이만희가 이호재(76)에게 헌정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호재는 고지식한 구두쇠 완애 역으로 무대에 선다. 연기경력 55년간 고매하고 성실한 선인부터 간교하고 음흉하고 게으른 악인까지 오가며 '천의 얼굴'이란 별명을 얻은 배우다. 이번 작품에서는 고집불통 노인의 풋풋한 첫사랑을 다채롭게 풀어낸다.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다가도 첫사랑 앞에만 서면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고 아이처럼 질투한다. 지금까지 보여준 폭발적인 에너지와 카리스마 대신 수줍은 미소를 발견할 수 있는 무대다. 객석에서는 따뜻한 웃음소리와 기분 좋은 박수가 터져 나온다.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귀여움에 '할배파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여기에 천진난만하면서도 노년의 능청스러움을 완벽하게 소화한 자룡 역의 배우 최용민(64)과 고단한 삶을 뚝심있게 이겨나가는 두 남자의 곱디 고운 첫사랑 다혜를 맡은 배우 남기애(55)의 호흡이 빛난다. 정말 우리 옆집에 이렇게 예쁜 할머니와 귀여운 할아버지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작품은 젊었을 때 감정에 치우쳐 배려 없이 했던 행동들이 인생의 길을 얼마나 뒤바꾸어 놓은 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선택에 대한 후회나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그래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사색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세 사람은 손을 잡고 함께 이스탄불로 떠난다. 모든 걸 아낌없이 서로에게 주기로 마음먹는다. 사랑도, 우정도 돈도. 늘 우중충한 옷만 입던 완해가 마지막 새하얀 정장을 멋지게 빼입고 여행길에 오른다. 환갑에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에 다시 선 모습이다. 보다보면 마음에 훈풍이 부는 따뜻한 작품이다. 훈풍은 돌풍이 되어 연극은 개막 후 3일 만에 전석매진됐다.
이 공연은 늘푸른연극제 마지막 작품이다. 한국연극협회가 주최·
주관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연극제로 우리 연극계에 기여한 원로연극인들의 대표작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올해는 평생 연극 외길을 걸어온 오현경 배우, 노경식 작가, 김도훈 연출가, 이호재 배우의 작품이 선정됐다. 27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김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