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는 가냘프고 미인이었다. 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영국 역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명성황후(1851~1895년)를 만난 후 남긴 기록이다. 1894년부터 4차례 조선을 답사한 비숍 여사의 눈에 비친 조선의 국모는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여인이었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에 맞서 남편인 고종의 친정을 이끈 정치가이자 주변 강대국의 힘을 저울질하며 조선을 지키려 했던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그를 시해한 일본 낭인들조차도 여장부로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까지 명성황후의 초상화와 사진으로 확정된 작품이 없어 그의 풍모를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대한제국 120주년·광복 72주년을 맞아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공개됐다. 서울 종로구 다보성고미술·다보성갤러리가 14일 평상복 차림의 명성황후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묵담채화 '전(傳) 명성황후 초상'을 발표했다. 가로 48.5cm, 세로 66.5㎝ 크기로 두건을 쓰고 하얀 옷을 입은 여성이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서양식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족자 뒷면에는 '부인초상'(婦人肖像)이라는 글자가 세로로 적혀 있다.
다보성갤러리 측은 "적외선 촬영 결과 '부인' 글자 위에 '민씨'(閔氏)라는 글씨가 있었으나 나중에 훼손된 것으로 확인했다"며 "그림 속 인물이 착용한 신발이 고급 가죽신인 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독립정신'의 명성황후 추정 사진과 용모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맞다"고 주장했다. 왕비가 평상복을 입어 격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저고리와 치마에 무늬가 있어서 평민이 입던 옷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명성황후 초상화로 단정할 만한 결정적 단서가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미술을 전공한 역사학자는 "실물을 보지 못해 정확한 감정이 어렵다"면서도 "한복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점을 보면 화가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일 확률이 매우 높다. 사진을 보고 얼굴과 두건만 베껴 그린 뒤 옷과 의자는 꾸며서 그린 것 같다. 초상화의 얼굴 모양도 일본인과 흡사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근대사 학자도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아닐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옷차림이나 용모를 보면 왕비의 초상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고 지적했다.
논란 속의 명성황후 추정 초상화가 14일부터 31일까지 다보성갤러리에서 전시된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인물들이 남긴 묵적(墨跡) 등 유물 300여 점도 함께 나왔다. 손병희, 윤봉길, 이준, 조병옥 등 독립운동가 15인의 글씨 대부분이 처음 공개된다는게 갤러리측 설명이다.
광복 72주년을 맞이해 한국문화정품관 갤러리는 15일부터 9월 10일까지 조선 궁중기록화를 재현한 황치석 조선왕조문화예술교육연구소장(56)의 개인전을 연다. 궁중기록화는 의궤를 포함한 궁중 행사를 기록한 그림으로 역사화(歷史畵)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황 소장이 20년 이상 꾸준히 작업해온 조선왕조 의궤와 궁중화, 전통 민화, 창작품 등 50여 점이 소개된다. 왕세자입학도, 조선수군조련도, 요지연도, 초충도 8폭 화첩,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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