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성수기 대작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 지난달 31일 시사회에서 처음 공개됐다. 루퍼트 와이어트가 연출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으로 리부트 3부작의 닻을 올린 이 시리즈는 2부 '반격의 서막'(2014)에서부터 멧 리브스가 감독직을 이어 받았다. 최종편인 3부 '종의 전쟁'은 이 미국 감독의 작가적 야심이 두드러진 한 편의 장엄한 종교·신화적 대서사시이며, 존 포드를 비롯한 서부극 거장들에 대한 오마주까지 더해진 보기 드문 걸작이다.
영화는 시리즈 여정을 요약해주는 내레이션에서 출발해 인류와 유인원과의 거대한 전투를 곧바로 펼쳐보인다. 신약의 유다처럼 유인원을 배반하며 인류에 부역하고 있는 또 다른 유인원이 눈에 띈다. 2부에서 인류와의 공존을 모색하던 시저와 이들에 대한 증오감에 사로잡힌 코바의 갈등이 중심 서사였다면, 이번엔 인류에 저항하는 유인원과 그 인류에 부역하는 유인원의 갈등, 인류와 인류의 갈등까지 보여주며 서사의 층위를 한층 드높인다.
눈여겨볼 건 극 초반 인류와 유인원 간 거대한 전쟁 스펙터클의 난장이던 영화가 이후 상당 시간 소수 유인원들로 구성된 서부극의 변주에 할애한다는 점이다. 유인원에 대한 끝모를 적개심을 가진 인류군 대령(우디 해럴슨)으로 인해 시저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무참히 도륙되면서다. 한때 평화주의자였던 이 유인원 왕은 이제 죽은 코바와 거울처럼 쌍을 이루며 복수심을 동력으로 인류군 본기지를 향한다. 그런 그의 뒤를 모리스, 로켓 등 동료 유인원이 말을 타고 뒤따른다.
이 여정에서 펼쳐지는 설경은 그야말로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다. 상당 부분 디지털 이미지이지만, 그럼에도 눈앞에 전경화된 풍광은 실로 기이한 감흥을 자아낸다. 그 복판을 '설야의 무법자'들이 나아갈 때, 고전 서부극들의 더없이 무심한 표정의 매혹적인 사내들, 존 웨인을 비롯한 헨리 폰다, 게리 쿠퍼 등의 명배우들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감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저 멀리 드러나는 설산의 흰 봉우리들이 우리 눈 앞에 우뚝 서 있다. 모뉴먼트 밸리를 재현해놓은 듯한 화면 후경의 거대한 봉우리들은 바라봄 그 자체로 압도되게 만든다.
영화는 인류군 기지에 당도한 시저가 맥없이 포로로 붙잡히면서 갈릴리 예수의 수난기에 대한 변주로 나아간다. 박해받는 유인원들의 왕인 그가 도착한 이곳은 그야말로 참혹한 아우슈비츠와 다를 바 없는 장소다. 복수심에 이끌려 왔지만 자신이 두고 온 공동체는 이미 나치와 다를 것 없는 인류군에 의해 거대한 야외 철장 안에 갖혀 버렸다. 인류군 대령은 그런 이들을 강제 노역시키고, 이들의 왕을 유인원들이 보는 앞에서 무참히 고문한다. 물론 이 모든 수난과 비극은 모세의 대탈출 서사로 나아가기 위한 전주곡이다.
시저가 설원에서 거둬들인 두 인물을 비롯해 이제 유인원들은 시저를 도와 대탈출 계획을 도모한다. 말을 잃은 인간 소녀 노바(아미아 밀러)가 어느 인간보다 순수한 성녀의 이미지를 체현하며 다 죽어가는 시저를 되살리는 이적을 행하고, 서커스단에서 탈출해 홀로 숨어 살던 깡마른 유인원 배드 에이프 또한 이들 공동체를 전적으로 돕는다. 그렇게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던 격언은 온전히 실현된다. 인류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가던 시저도 결국엔 그 감정을 거둔다. 장엄한 대탈출과 거대한 눈사태 이후 이 영화 마지막 신은 마치 창세기의 21세기형 판본처럼 여겨진다.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된 시저와 여타 유인원들의 깊이 있는 연기는 정말이지 경이로울 정도다. 고뇌하는 시저의 눈빛과 주름진 표정은 물론 공동체를 배반했으나 종래에 속죄의 제스츄어를 취하는 유인원의 흔들리는 내면과 양심의 미세한 떨림마저 그대로 전해진다. 또하나 놀라운 건 이 영화의 서정성이다. 서사로 편입되
지 않은 잉여의 장면들에서 이 장엄한 이야기에 독특한 시적 분위기를 띄운다. 그 기적의 중심엔 머리에 분홍 꽃을 꽂은 노바라는 인간 소녀가 있으며, 수화와 자막 중심(이 영화는 대사가 적다)의 무성영화적 정조가, 감정을 오롯이 길어 올리는 섬세한 클로즈업이 있다.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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