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사이의 당나귀, 인간과 고양이 사이의 당나귀, 제3자로서의 당나귀, 문학은 이 존재를 형상화한다. 아니 이 존재가 문학을 요청한다."
심보선(47)에게 문학은 '당나귀의 말'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당나귀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주술사인가. '오늘은 잘 모르겠어'(문학과지성사)를 본 사람들은 당혹스러울 대목이 있을 법도 하다. 해설 대신해 작가가 쓴 '당나귀문학론'이 실렸고, 수십 쪽에 달하는 장시 '마치 혀가 없는 것처럼''브라운이 브라운에게' 등이 실려서다. 하지만 당혹감을 거두고 읽어나가면 시인의 변신을 직감하게 된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눈앞에 없는 사람' 단 두권의 시집으로 대중과 문단의 사랑을 양손에 쥔 그의 3번째 시집이 6년간의 침묵을 깨고 묶여 나왔다. 시인이기에 앞서 사회학자로서 지난 세월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일까. 이번 시집에는 낮은 곳을 향하는 목소리가 여럿 실렸다.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 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 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라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중 사망한 소년을 호출한 시인은 "소년이여, 비좁고 차가운 암흑에서 얼른 빠져나오렴"이라고 위로를 건넨다.
"나는 우리에게 벌어진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어요"('예술가들')라는 다짐처럼 삶의 슬픔과 고통, 어둠에 주목하면서도 그 안에서 긍정적 결말과 희망을 이끌어내는 그의 시들을 만날 수 있다.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언어로 읽는 맛이 탁월한 시를 써온 그의 언어의 질감도 여전하다.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오늘은 잘 모르겠어')와 같은 싯구는 SNS에서 쪽글로 숱하게 공유된 그의 전작들처럼 독자들의 애정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당나귀의 말에 귀 기울일 시간이다.
[김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