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에 이어 덕혜옹주(손예진)의 삶을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보여준다. 극의 긴장감을 잃지 않기 위해 김장한의 플래시백을 활용하는데, 과거와 현재를 여러차례 교차하면서 평면적으로 흘러갈 수 있을 서사의 진부함을 입체적으로 구현해낸다. 독살된 고종황제의 어린 딸에서 출발해 친일파 한택수(윤제문)에 의한 만 13세 강제 일본 유학, 김장한 등 독립군들의 물심양면 지원에 힙입은 고국행 시도와 안타까운 좌절. 노인이 된 신문기자 김장한이 실종된 그를 찾고, 마침내 고국으로 데려오게 되는 과정 등. 영화는 마지막 황녀의 전(全) 일대기를 가장 효율적으로, 거의 남김없이 21세기 스크린에다 펼쳐놓는데 성공한다(극의 전반부가 약간 늘어지는 느낌이지만 그리 문제될 건 없어 보인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등의 명작 멜로들을 만들어 온 허진호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이 이번에도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극 중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그는 덕혜옹주의 일생을 꽤나 관조적인 태도로 카메라에 담는다. 비극의 시대에는 사랑마저 사치라고 여긴 걸까. ‘로맨스 영화의 대가’로 정평난 그이지만 멜로물의 느낌은 가급적 배제했다. 극 중 일부 신을 제외하면 로맨스 코드라 여겨지는 부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변질되었다면 극의 몰입도는 현저히 떨어졌을 것이다.
영화는 오로지 일본군 장교라는 위장된 신분으로 마지막 황녀를 돌보는 김장한의 진실된 모습과 그럼에도 시대의 파고(波高)에 휩쓸릴 수밖에 없던 그와 황녀의 아픈 삶을 비추는데 골몰할 뿐이다. 이를 위해 연출자가 취하는 건 덕혜옹주를 바라보는 김장한의 담담한 시선이다. 이는 곧 허 감독 자신의 시선이기도 하다. 그 안에 감정의 과잉이란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과도한 감정이입에서 한 걸음 물러난 이 태도는 영화의 몰입을 오히려 도와준다. 카메라는 천천히, 다만 보여주고, 또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감정의 여백을 키움으로써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우리 모두의 비극이었음을 성찰하게 된다.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한 데에는 안정된 연기를 펼쳐보인 배우들의 공이 매우 클 것이다. 막바지 단 한 번의 신에 이르기까지 흔들림없이, 절제된 연기를 선보이는 박해일의 연기 내공은 정말이지 탁월하다. 그런 그와의 작업을 오랜기간 염원했던 손예진 역시 또 한 번의 도약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에 이어 도대체 이 여배우의 한계란 어디까지인지 되묻게 된다). 극의 말미, 일본천황의 항복 선언이 들려오고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나 끝내 입국 거부의 벽에 가로막힌 황녀, 철퍼덕 주저앉아 토해내는 그의 핏빛 절규.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정신병원에 감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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