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여 년 간 피아니스트 백건우(70)에게는 ‘건반 위의 구도자’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무수한 기사와 평론에 천연덕스럽게 자리한 덕에 이젠 대명사처럼 여겨지게 된 이 말의 연원이 궁금했다. “글쎄…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고민에 잠긴 남편 대신 자리에 함께 한 부인이자 배우 윤정희가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자기의 모든 걸 바쳐서 음악을 하니까 그렇지. 집에서도 하루종일 곡 하나에 매달려 있다가 밤 늦게 ‘이제야 좀 알겠어!’라며 기뻐하는 게 이이예요.”
예사 여정은 아니었다. 어느 하나에 꽂히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자세로 지난 세월 오직 음악을 위해 살았다. 세계적 명성을 불러온 1972년 라벨 독주곡 전곡 연주부터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전곡, 스크랴빈 독주곡 전곡,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 등은 그의 헌신이 낳은 음악적 유산 중 일부다. 올해는 그가 연주자로 데뷔한 지 꼭 60년이 되는 해. 특별한 무대 두개를 준비중인 그를 지난 8일 오후 서울 일신홀에서 만났다.
“음악이 주는 숙제가 너무 많아.” 한 해도 쉬지 않고 무대에 오르는 게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것도 매 공연마다 다른 작곡가의 다른 곡을 새로운 해석으로 선보이려는 탓에 들어가는 품은 배가 된다. “예술가는 창조하는 존재예요. 매 순간 처음으로 느끼고 처음으로 들리는 것들을 표현하는. 어찌 보면 위태롭죠. 늘 나도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서야 하니까.”
20대 시절 각종 콩쿠르를 휩쓸고 라벨 전곡으로 뉴욕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미국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던 그가 돌연 프랑스행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때 쉴 새 없이 연주를 다니던 중 참 이상하더라고. 무대에 들어서기 전, 몇 분 후 이 곡을 어느 감정으로 어떻게 치고 있을 내 모습이 자동으로 그려지는 거야. 내가 나를 흉내내는 것밖에 안 되는 것 같았고, 이래선 예술가로서 죽음이라 느꼈어요.”
쉬지 않고 달려온 반 세기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그를 향한 팬들의 사랑도 지극하다. 그의 사인회에선 ‘어릴 적 피아노 학원 다니며 선생님 음반을 듣고 자랐다’며 눈물 짓는 중년여인이 역시 피아노를 배우는 자신의 아이를 데려와 인사시키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고,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집요한 팬들도 많다. 이를 언급하자 그는 “아유, 쫓아다니는 사람들 좀 있어요”라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오는 9월 29일 서울서 갖는 공연은 바로 이 팬들을 위한 것이다. 관객들이 백건우의 연주로 듣고픈 곡들을 미리 신청하면 이중 4~5개를 골라 이날 선보이는 형태다. 콘서트 제목은 말그대로 ‘백건우의 선물’. “올해 일흔이잖아요. 몇십년 간 함께 한 팬들에게 뭔가 선물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했죠. 또 사람들이 내가 어떤 곡을 치는 걸 듣고 싶어하는 지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무척 궁금하기도 했지.” 신청곡 접수는 오는 20일 마감(www.vincero.co.kr)인데 이날까지 벌써 90곡이 접수됐다.
피아노 앞에 앉아있지 않을 때 그는 여행과 사진을 즐긴다. 연주를 위해 세계 방방곡곡을 들를 때마다 부부는 늘 손 잡고 걸으며 그곳의 풍경을 감상하고 카메라에 담는다. 부인은 “또 남편 자랑 같지만, 이이가 사진을 너무 잘 찍어”라고 귀띔했다. 최근 방문한 스페인은 부부가 가장 사랑하는 곳 중 하나다. 오는 17일 스페인 내셔널 오케스트라와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의 작품을 연주하는 무대가 더욱 뜻깊은 이유다. “따뜻한 햇빛이 있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라틴의 매력이 있죠. 집에 쌓아둔 스페인 작곡가들의 악보만 수천 장이야.”
라벨이면 라벨, 베토벤이면 베토벤 식으로 그에겐 유독 한 작곡가의 전곡을 탐구하는 프로젝트가 잦았다. 이유를 묻자 그는 곧장 “궁금하니까”라고 했다. “산을 정복하려면 한 길만 걸어갖고는 알 수가 없잖아. 산 전체를 봐야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이란 걸 이해할 수 있고…. 매번 오를 때마다 새로운 볼거리와 몰랐던 길이 생기는 게 신기해.” 요즘도 매일같이 6~7시간 연습에 매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습 할 때마다 ‘왜 전에 이걸 못봤지?’ 하는 부분이 생겨요. 이 차이가 아직 내게 들린다는 게 축복이지.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 음악세계는 끝나는 거예요. 이러니 피곤해도 연습을 계속 할 수밖에 없지.”
인터뷰 말미 아차 싶었다. ‘건반 위의 구도자’란 별명의 속사정을 굳이 물을 필요조차 없었단 걸 절감한 탓이다. ‘깨달음의 경지를 구하는 자’라는 뜻의 ‘구도자’에 그보다 더 맞아떨어지는 사람도 없었다. 내년엔 20
7월17일, 9월29일 그의 공연은 모두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다. (02)599-5743 빈체로.
[오신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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