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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굴러다니는 문구는 누군가에게 창조와 영감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창작물을 잉태하는 일상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런던 문구 클럽 공동 창설자인 저자는 완벽한 디자인의 볼펜부터 연속 동작이 생명인 스테이플러까지 문구를 재조명한다. 그는 문구류의 발전을 추적하며 “문구는 삶의 방식을 규정하며 문화를 파악하고 평가하는 지표”라고 말한다. ‘나는 지루한 것들을 좋아해’라는 괴상한 이름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그는 별뜻없이 지나칠법한 일상의 찰나를 포착하는데 선수다. 그는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문구에서 매혹적인 이야기를 길어오른다. 이 책을 읽고나면 문구의 위대함에 압도당하게 된다.
소박한 문구는 우리의 삶을 바꿨다. 눈에 띄는 곳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은 시각적으로 기억을 환기시켜줌으로써 “우리가 머리를 비우고 살수 있도록” 도와줬다. 일상에 유용한 ‘친구’를 넘어 문학, 예술로도 발전했다. 영국 작가 윌 셀프는 포스트잇에 단상을 모아 글을 쓰고, 캘리포니아 화가 리베카 머토프는 침실을 포스트잇으로 꾸민 설치미술을 선보였다. 지우개도 빼놓을 수 없다. 저자는 “과거를 돌아가는 실수를 바로잡는 지우개가 있었기에 우리 과학, 사회, 문화가 발전했다”면서 “지우개는 흑연가루를 털어내는 도구가 아니라 중요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 도구”라고 말한다.
작가들이 연필에 집착한 이유도 문구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작가는 “연필은 타자기나 볼펜과 달리 작가의 실수를 용인해준다”면서 “초고를 시작하는 두려운 마음을 덜어주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날카로운 성찰이 빛나는 대목이다.
문구사(史)가 엉뚱한 분야의 물줄기와 합치되는 지점도 흥미롭다. 1960년대 평범한 여직원 벳 맥머리는 간판 작업을 하는 화가들이 덧칠하는 것을 보고, 오타 위에 덧칠하는 수정액을 개발했다. 수정액으로 인생역전한 그는 죽을때 아들에게 2500만 달러를 유산으로 남겼다. 당시 미국 팝밴드 몽키스의 멤버였던 아들(마이클)은 엄마가 물려준 돈으로 음악 비디오를 틀어주는 TV쇼 ‘팝 클립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훗날 MTV의 모태가 된 프로그램이다. 작가는 “비디오는 라디오스타를 죽였지만, 비디오(채널)를 낳은 것은 수정액”이라고 평했다.
우연과 사고로 점철된 소품들의 탄생비화는 독자를 빨아들이기 충분히 매혹적이다. 찌그러진 듯한 납작한 형광펜 스타빌로 보스는 모든 디자인이 거절당해 열 받은 직원이 주먹으로 내리친 ‘사고’로 탄생했다. 포스트잇, 스테이플러, 접착제 등 문구에 얽힌 ‘비사’가 풍성하게 쏟아진다.
우리의 일상을 디지털 도구가 점거하면서 공책과 연필은 이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낡은 유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는 “문구의 종말은 오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한다. 전구의 발명 이후 양초가 사라지지 않고 예술로 승화됐듯이, 문구만이 선사하는 기쁨은 디지털 시대에 더 강력하다는 것이다. 손에 힘을 주어 획을 내려 긋는 기쁨, 종이를 한장씩 넘기며 읽는 기쁨…. 디지털 생활이 강고해질수록
[이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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