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아무리 무한한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흡혈귀라도 이 땅에 살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것들이 있고, 이는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생계형 흡혈귀를 통해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 김나정 작가
영화 ‘트와일라잇’ 속 카리스마 넘치는 뱀파이어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그 판타지를 버리든지 아니면 발길을 돌리는 편이 더 빠를 것이다. 뮤지컬 ‘상자 속 흡혈귀’에 등장하는 흡혈귀들은 ‘생계형’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삶이 팍팍하기 그지없다.
이들의 직업은 폐장을 앞둔 유원지 드림월드 비정규직 알바생, 과거 불멸의 존재이자 중세 루마니아를 떨게 한 뱀파이어 로열패밀리였던 이들은 수백 년의 세월을 방랑해 오면서 가졌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인간의 눈에 띠지 않기 위해 최대한 정체를 감추며 살아간다. 인간을 해치지 않는 대신 수혈한 피를 훔쳐다 먹고, 부족한 수익은 부업으로 뜨개질을 하며 벌어간다. 이들의 최대 꿈은 인간이 줄 서면서 피를 수혈하는 헌혈차를 사는 것과, 좋은 시설의 ‘높데월드’에 보금자리를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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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속 흡혈귀’는 신춘문예 희곡부문을 수상한 바 있는 김나정 작가의 작품을 무대로 옮긴 창작 뮤지컬이다. 23일 오후 서울 대학로 SH아트홀에서 진행된 ‘상자 속 흡혈귀’ 프레스콜에서 김나정 작가는 “‘인간과 흡혈귀가 무엇이 다를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무한한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흡혈귀도 오늘날 이 땅에 살기 위해 치러야 할 것이 있고,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며 “아냐가 높데월드를 사기 위해 37년을 꼬박 일을 해야 한다. 이는 흡혈귀에게 금방이겠지만 사람에게는 인생의 절반이다. 파팍한 삶의 조건들을 흡혈귀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영화로웠던 과거를 잊지 못하며 연속극에 빠져 사는 엄마 쏘냐와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인 아들 바냐, 현실적인 막내 딸 아냐는 극중 인간들 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사회를 풍자한다.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들이지만, 도리어 그들의 삶은 인간들의 욕심으로 인해 고혈을 빨아 먹히며, 끝내 삶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2010년 동명의 연극 작품으로 공연된 바 있는 ‘상자 속 흡혈귀’는 이용균 연출의 손을 통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이 연출은 “2년 전 ‘상자 속 흡혈귀’의 대본을 보게 됐다. 처음에는 뮤지컬이 아닌 연극으로 올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작년에 다시 보니, 뮤지컬로 만들면 다른 색깔이 나올 것 같았다”며 “작품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각자 다르겠지만, 그래도 궁극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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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형 흡혈귀들의 팍팍한 삶의 애환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음악을 담당한 김혜영 작곡가는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어디에서 어디로’이다. 리딩 때는 없었고, 수정 작업을 하면서 들어가게 된 곡”이라며 “현실에서 뱀파이어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울리고 대변할 수 있는 곡이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 간의 합도 매우 유쾌했다. 바냐 역의 이지호 김도빈, 아냐역에 한수림, 쏘냐 역에 문혜원 진아라 등 모든 배우들의 연기는 탄탄했으며, 익살맞은 농담을 주고 받는 모습은 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게 했다.
김도빈은 또 다른 바냐 역을 맡은 이지호와의 차이점에 대해 “느끼함과 담백함이라고 보시면 된다. 이지호가 느끼함이고 제가 담백함”이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지호 역시 이를 받아드리면서도 “느끼함과 담백함일 수 있지만 제가 조금 더 활기차다. 도빈이형보다 밝은 이미지로 가지고 있고 긍정적”이라며 자신만의 장점을 부각시켰다.
마지막으로 ‘상자 속 흡혈귀’의 김 작가는 작품에 대한 바람에 대해 “망연자실한 작품이었으면 좋겠다. 기운이 빠지고 살기 싫어지는 것이 아닌 ‘사는 게 뭘까’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며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애잔함,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잔함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털어놓았다.
한편 ‘상자 속 흡혈귀’는 23일부터 12월31일까지 대학로 SH아트홀에서 공연된다.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