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 진정한 사랑은 이미 종말했습니다.”
‘피로사회’로 성과주의가 만연한 한국사회에 논쟁적 화두를 던진 재독 철학자 한병철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56)가 이번엔 사랑에 관한 도발적 주장을 던지며 한국을 다시 찾아왔다. 신간 ‘에로스의 종말’(문학과지성사)를 출간하고 5일 기자간담회를 가진 한 교수는 “세속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단순한 ‘성애’로 변질됐다”면서 “오늘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투쟁 가운데 하나는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이라고 말했다.
이 책은 오늘날 세계에서 진정한 사랑이 왜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가를 흥미롭게 분석해나간다.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눈 속의 사냥꾼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을 예로 들며, 그는 재난으로서의 사랑의 정의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두 개인 사이의 가벼운 계약 관계가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경험이다. 필연적으로 자아의 파괴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현대인에게 이 ‘재난으로서의 사랑’은 사라져버렸다. 그에 따르면 이는 물질주의가 만연한 세속적 욕망과 SNS를 통한 소통 때문이다.
“‘좋아요’를 통해 자기만족을 느끼는 나르시시즘이 만연한 사회는 병폐적입니다.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 자신의 늪에 갇혀 익사할 수 있죠. 현대인들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지 않도록 사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너무나 위험하고 상처를 받을수 있으니까 여러명에게 주식을 사듯 분산투자를 하죠.”
사랑의 종말을 이야기하며 그가 든 예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다. 이 소설에서 두 남녀의 사랑은 정해진 근무 시간, 정의된 업무 등이 규정된 철저하게 계약된 관계다. 이것이 소비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오늘날의 사랑에 관한 은유라는 것이다. 한 교수는 “사랑이 프로젝트가 되고, 경영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지만 사랑은 죽어버린다”고 일갈했다. 또 “우리 사회는 이런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밖에서는 셀카를 찍고 우울증에 빠져 집에서는 자해를 하는 변태적 사회로 변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사랑의 재발명은 타자를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의 회복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SNS를 통해 소통을 하니까 갈등을 언어로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고립된 개인들은 아파하고 있다. 친구와 이웃과의 사랑과 연대가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그는 이날 2주전 발행된 독일 슈피겔지를 들고 나왔다. 그는 “국제적인 문제가 일어나면 밤잠을 설친다”면서 최근 유럽의 난민문제에 관한 비분강개를 털어놓기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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