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시간이 지날수록 뮤지컬 무대가 영상에 기대는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한층 진보된 영상 기술은 아무것도 없는 벽에 화려한 그림을 수놓는가 하면, 살벌한 지옥의 풍경을 그려내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극중 인물들의 복잡하고 어려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영상기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뮤지컬 중 하나는 바로 서울예술단에서 제작한 ‘신과 함께’와 ‘잃어버린 얼굴 1895’(이하 ‘잃어버린 얼굴’)이다. 잘 만들어진 무대 위에 정확한 계산에 의해 탄생한 영상 기술은 화룡점정을 찍으며,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한다.
잘 만들어진 뮤지컬이라는 호평을 받은 ‘신과 함께’의 성공 뒤에는 영상이 차지한 몫도 적지 않았다. 극 초반 영상기술을 통해 마치 TV에서 촬영된 영상을 보는 듯 생생한 지하철의 풍경을 재현하는가 하면, 저승차사 진기한이 사용하는 술법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간담서늘한 지옥의 풍경은 물론이고, 헬벅스, 김밥지옥, 헬플러스 등 익숙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저승의 간판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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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얼굴’에서는 빈 액자로 가득한 무대에 하나씩 흑백사진을 채우면서 순식간에 1900년대의 사진관으로 바꿔놓는다. 그런가 하면 상승하는 무대에 맞춰 거대한 기둥을 만든다든지, 때로는 조선말 고종과 명성황후를 둘러싼 개화기의 어지럽고 불안한 시대상황을 그려내기도 한다.
영상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고 평을 듣는 두 작품 모두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를 통해 만들어졌다.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는 ‘신과 함께’ ‘잃어버린 얼굴’은 물론 뮤지컬 ‘이른 봄 늦은 겨울’ 연극 ‘나는 형제다’ 등 다양한 작품에서 영상작업을 하면서 영상 미술의 수려함과 한층 진보된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여러 작품에서 그 두각을 나타낸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는 창작뮤지컬 시상식 예그린어워드에서 디자이너상을 거머쥐며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여전히 바쁘게 뛰어다니는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를 만나 뮤지컬 영상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수려한 영상 디자인…“색감은 자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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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에피타프 |
뮤지컬 무대에서 영상을 활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의 작품은 아니지만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경우에도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에 영상을 통해 고흐의 다양한 작품들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가 작업을 했던 ‘신과 함께’와 ‘잃어버린 얼굴’의 영상이 호평을 받았던 이유는 단순히 기술이 탁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뮤지컬 ‘서편제’를 통해 무대 위 수묵화를 그리는 듯한 영상미술을 완성시키면서 그 실력을 인정받았던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는 각각의 극의 분위기에 걸맞은 적재적소의 기술을 발휘하며 극에 더욱 몰입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저와 함께 일을 하는 팀의 명칭이 에피타프이다. 에프타프의 영상만의 특징이라고 하면, 전환영상을 들 수 있다. 암전 없이 무대전환 시 영상을 프로젝션해서 장면전환이 매끄럽게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강점이고, 색감 역시 자신이 있다. 색감과 관련해서는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릴 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세계 각국의 미술을 감상했는데, 이를 통해서 다양한 색을 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같은 파랑이라도 인도에서 사용하는 파랑과 유럽에서 사용하는 파랑이 다르다. 이런 색감이 영상작업을 할 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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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진 영상 디자이너가 소속된 에프타프는 다양한 공연에서 다양한 기술들을 접목시키며 눈길을 끌어왔다. ‘그날들’에서는 전환영상을, ‘이른 봄 늦은 겨울’에서는 미술로서의 영상을 접목시켰으며 ‘신과 함께’는 세트와 조명으로써의 영상을 사용했으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경우 리어프로젝션에 2만 안시 8대사용하기도 했다.
“때때로 영상은 기존의 작화를 대신하는 역할도 한다. 이 같은 성격으로 인해 영상은 무대미술의 새로운 장르라고 할 수 있는데, 종종 그 영역을 무대 디자인의 일부분 혹은 조명의 일부분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다. 가장 많이 충돌하는 부분은 세트다. 조명의 경우 이제 영상에 대한 인식과정을 지난 상태여서 서로의 시너지를 잘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면 세트의 경우 영상을 어느 곳에 보이게 할 것인지를 다루는 매개체이기 때문에 매우 긴밀하게 작업돼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세트와 합이 이뤄지지 못할 경우 세트의 재질과 색감, 형태, 방식에 따라 영상이미지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때로는 영상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제가 직접 세트디자인까지 하는 이유도 있다.”
◇ “그냥 얻어지는 결과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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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에피타프 |
객석에서 보기에 마냥 화려해 보이는 뮤지컬의 영상 디자인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질까. 영상 작업의 시작에 대한 질문에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는 ‘텍스트’를 꼽았다.
“작품의 콘셉트를 듣기 전 텍스트를 가장 먼저 읽고 난 뒤, 떠오르는 것을 하나씩 잡아나가기 시작한다. 이후 연출에게 제가 생각한 방향을 제시하고 최대한 작품에 어우러지도록 만들어 나간다. 영감은 주로 꿈에서 가져올 때가 많다. 제가 총천연색 꿈을 꾸는데, 자고 일어나면 바로 꿈일지를 쓴다. 꿈에서 작품을 보거나 갤러리 전시회를 보다 감탄하면서 깰 때가 많은데, 그걸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다. 영상이란 실제 하지 않는 이미지와 세트라는 물질세계와 잇는 매개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으로 볼 때 ‘꿈일지’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는 본격적인 영상 작업에 들어서면서 생기는 갈등과 어려움들을 토로하기도 했다.
“위에서는 무조건 퀄리티가 좋으면서 저렴하고 빨리 나올 수 있는 영상을 원하는데, 진짜 좋은 영상은 저렴하면서도 빨리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영상이 쉽게 쉽게 바뀌니 쉽고 싸게 작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질 좋고 빠르고 좋은 작품은 세상에 없다. 시간을 들인 만큼 그리고 지원을 한 만큼 영상의 질이 좋아지는 데, 의외로 이를 아는 이들이 많이 없더라. 시간을 빠르게 할 거면 금전적인 영역에서 포기를 한다거나 금전적인 부분을 아끼고 싶다면 질을 포기한다거나.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상의 질과 금전, 그리고 시간의 관계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는 이내 영상의 질이 낮으면 결국 지탄을 받는 것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관객들의 눈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수준이 높다. 이미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을 통해 진보된 CG와 같은 영상 기술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장르들은 빠르게 발전하는 반면 공연계에서는 발전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결국 관객들은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영상은 시각적인 부분이어서 가장 민감하고 단번에 알아채는 영역인데,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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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에피타프 |
자신의 직업에 대해 영상 디자이너 대신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말한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는 작품에 임하는 각오로 “열사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영상에 주어지는 예산이나 혜택, 대우는 말도 안 되게 열악하지만 후에 있을 후배들을 위해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가는 저를 통해 역사가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것이 영상 디자인에 표준 계약서가 없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구두계약이었다. 이는 힘들게 만들어 놓은 작품에 대한 저작권도 취약하고 카피하기 쉬운데 이에 대한 보호가 없다는 것이었다. 작업을 하면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필요한 조항도 점점 늘려나가고 있다. 차라리 공연이 아니라 방송이라든지 다른 영역으로 가는 것이 더 쉽다. 실제로 후배가 되고 있어서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는데 얼마 하지 못하고 그만 두더라. 그만큼 이 분야가 힘들고 개척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아무리 과거에 비해 영상 디자인의 중요성이 부각됐다고는 하나 여전히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는 목소리를 높였다.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영상은 시간을 들인 만큼 퀄리티가 높은데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며칠뿐이다. 최소한의 시간만 주어지니 맞춰보지도 못한 채 무대 막이 올라갈 때가 많다. ‘잃어버린 얼굴’의 경우 정말 급하게 마친 작업이었다. 3일 동안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매달렸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부족했고,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잃어버린 얼굴’을 한 뒤에 진담 반 농담반으로 ‘맵핑의 여신’이 됐다고 말하곤 한다.(웃음) 이제 어지간한 맵핑은 다 할 수 있을 정도다. 정말 바라는 것은 작업할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다. 이는 프로덕션의 문제이자 한국 창작 공연들의 문제이다. 정상적으로 몇 개월이 필요한데 하다못해 일주일만이라도 작업에 열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지막 가는 길 정재진 영상 디자이너에게 다음 활동에 대해 물어보았다.
“유준상 씨랑 기획하는 것이 있다. 이른바 예그린 수상동기라는 밴드 활동이다. 예술의전당과 함께 하려고 하는데 야외 작품이다. 공동의 작업이라는 묘미가 있고 재미있을 것 같다.”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 디자인=이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