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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같이 있어줄 수 있어요?”“그럼요. 그게 제가 할 일입니다.” ‘상황과 비율’에 등장하는 포르노 영화를 찍는 여배우와 촬영장에서 도망 친 그녀를 잡으러 찾아나선 차양준 감독의 대화다. 연출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도망친 여배우를 찾아낸 감독은 정성을 다해 마음을 돌린다. 출연 영화에 악플이 달리는 비율이 낮고, 얼굴이 비춰질 때 정지화면을 누르는 경우가 타 배우보다 월등하니 팬들은 웃는 얼굴을 좋아한다는 데이터를 말해주며. 연관 검색어가 ‘가슴’인 배우로선 예상못한 이야기다. 성적 자극을 더이상 느끼지 못해, 비닐봉지에 바람을 불어넣고 터뜨릴 때만 짜릿한 감각을 느끼게 된 그녀의 마음은 생각지 못한 계기로 열리고 촬영은 다시 시작된다. 모두가 외로운 세상에서 위안이란 사소한 일로 찾아오는 법.
‘보트가 가는 곳’은 갑작스레 미확인비행물체가 나타난 크리스마스 이브의 이야기다. 이들이 떨어뜨리는 공은 거대한 구멍을 만들고 소리없는 살육이 일어난다. 한발만 헛디뎌도 죽을 수 있는 세상은 감정이 매말라버린 화자에게도 옆에서 위태롭게 걷는 여인을 향한 애틋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종말을 앞두고 쿵쾅거리는 심장은 그녀에 대한 동정을 사랑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마지막 소설인 ‘요요’를 읽고나면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시간’임을 알게 된다. 차선재는 부모의 이혼에 상처받고 시계조립에만 즐거움을 느끼게 된 남자. 대학에 진학해 첫사랑 장수영을 만나지만 첫방학에 알쏭달쏭한 편지하나만 남기고 그녀는 자취를 감춘다. “시침과 분침이 겹쳤다가 떨어지는 순간, 그건 멀어지는걸까, 아니면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걸까.” 55세의 시계장인이 된 그 앞에 마침내 수영은 찾아온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얼굴. 다시 만난 뒤 그는 비로소 편지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
해설도 추천사도 없는 담백한 소설집이 주는 여운은 길다. 쉽사리 포옹조차 나누지 못하는 이들의 만남과 엇갈림을 통해 사랑의 정의에 관해 질문하는 소설집이다. 답을 찾는 건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지만.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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