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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성모상’이 사랑받고 있는 몬세라트 분도 수도원 <사진제공=주교회의> |
프란치스코 교황은 22살에 예수회에 입회해 평생을 성 이냐시오의 영성으로 살아온 수도자였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회의 영성이 그의 ‘좌우 날개’였다. 예수회의 모토는 청빈과 겸손, 단순함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 474년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에 즉위한 건 “고위직에 오르고자 애쓰지도 야망을 품지로 말라”는 이냐시오 성인 가르침때문이었다. 예수회는 내년 성 이냐시오 선종 450주년을 앞두고 로욜라를 비롯한 ‘카미노 데 이냐시오(이냐시오 순례길)’ 전역에서 기념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도시의 중앙에 자리잡은 로욜라 대성당에는 책을 펴든 성 이냐시오의 청동상이 서있다. 책에는 ‘하느님의 보다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16세기 예수회는 교황청이 종교분열의 혼란에 맞서 반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할 때 선봉에 섰다. 세속에 물들어가는 교회와 입신양명에 한눈을 파는 성직자들에게 실망한 이냐시오는 1541년 예수회를 설립하며 “오로지 주님만을 섬기고, 그분의 대리자인 교황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배필이니 교회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성당 한 켠에는 군사 요새 같은 이냐시오의 생가가 남아있다. 이니고라는 이름으로 영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나바라의 스페인 부왕의 군인이 된 그는 대불전쟁에 참전했다 포탄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고향의 병상에서 그는 작센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고 감동해 30세에 하느님께로 회심했다.
로욜라를 찾은 성도들을 감읍(感泣)시키는 곳은 생가 4층의 ‘회심의 소성당’. 30㎡ 남짓한 공간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이냐시오의 황금색 동상과 함께 작은 제대(祭臺)로 꾸며졌다. 상념 속에서 밤을 지새던 이냐시오는 어느 날 이 방에서 고백했다. “나는 자주 오랫동안 창문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을 섬겨야한다는 강한 충동을 받았습니다” 참회한 뒤, 성지 예루살렘을 참배하고 그곳에서 남은 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로욜라 대성당의 접견책임자 아이노와 빌라 씨는 “연간 10만명이 이냐시오 성인의 흔적을 찾아 방문한다. 한국인도 연간 4000여명이 오는데 인구대비 1위일 것”이라며 “로욜라에는 200명을 수용가능한 스페인에서 가장 큰 영성센터가 있고, 비신자들도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효과’는 로욜라에도 불었다. 2013년 교황 선출이 발표된 날, 로욜라는 유래없는 광란의 밤을 보냈다. 전세계 모든 매스컴이 이 소도시를 찾아온 것. 노신부들이 수행하던 조용한 수도원은 교황을 배출하며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다. 방문객은 이후 25%가 늘어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추기경 시절인 1986년 교육과정을 위해, 1991년 이냐시오 탄생 500주년 행사차 두 번 로욜라를 방문했다. 빌라 씨는 “교황께서는 가난과의 투쟁이라는 예수회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다”며 “놀라운점은 가난한 이들도 동성애자 이혼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을 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심한 이듬해 3월 이냐시오는 깍아지른듯한 바위산 속 몬세라트 분도 수도원을 방문해서 죄를 고백했다. 유럽에 단 두 개뿐인 검은 성모상 앞에서 예수와 성모의 환시(幻視)를 보고, 그는 세속을 상징하는 칼을 바친 뒤 지팡이에 의지해 길을 떠났다. 오늘날 몬세라트 분도 수도원은 소년합창단이 하루 두 차례 갖는 성가(聖歌) 공연과 검은 성모상으로 전세계 성도들을 자석처럼 끌어모으고 있다. 11일에는 6월부터 10월까지 이어지는 성수기를 맞아 순례객들이 2~3시간씩 줄을 서서 성모상에 입을 맞추고 기도하고 있었다.
‘이냐시오의 길’ 마지막 방문지는 몬세라트 인근의 만레사였다. 몬세라트를 떠난 이냐시오는 이 곳의 깊은 동굴에서 묵상과 고행의 생활(1522~23)을 보냈다. 이는 그의 저작 ‘영신수련’(1548)의 기본이 되었다
[로욜라·몬세라트·만레사(스페인) =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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